.. “미용실이 생겨날 때만 해도 다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는 남자 손님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남성전용 클럽은 느낌부터가 달랐어. 돈으로 밀어붙인다고 할까. 이 바닥은 이 바닥대로 쉬어 온 숨소리가 있는데 그 숨소리마저 돈으로 쓸어버릴 것 같았지.” .. (114쪽)
지난주에도 집에서 더는 안 보는 책이랑, 우리한테는 쓸모가 없으나 다른 이한테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책을 여러 꾸러미 헌책방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선물입니다” 하고 말씀드리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로서는 이 책들은 마음에 담아낸 줄거리로 넉넉하고, 읽는 동안 가슴이 뿌듯해졌기 때문에, 그 일로도 얼마든지 값을 다했습니다. 이 책들을 헌책방에 내놓으면서 몇 푼이나마 값을 받아도 나쁘지 않지만, 우리 스스로 값을 안 받으면서 이 책들이 좀더 눅은 값으로 또다른 책손을 만나서 기쁘게 읽혀 주었으면 하고 꿈을 꿉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는 책쉼터가 되는 헌책방이, 앞으로도 꾸준히 살림을 알뜰살뜰 꾸리면서 우리 아이한테도, 또 우리 아이가 먼 뒷날 낳아 기를 아이한테도 언제나 가까이 찾아갈 수 있는 놀이터이자 책터이자 만남터이자 사람 부대끼는 삶터로 단단히 뿌리내려 주면 좋겠다고 비손을 올립니다.
.. 가만! 빠뜨린 게 하나 있다. 아침 7시 반, 출근을 너무 빨리하는 것 아니냐며 묻자 그는 출근하는 사람들을 걸고 넘어졌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그 시간에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이 바람을 넣으러 가게에 들렀다가 문이 닫혀 있으면 얼마나 허탈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 세 방 중 한 방 정도는 공짜로 ‘빵꾸’를 때워 주던 ‘섬산 자전거포’ 그 아저씨를 닮은 듯했다 .. (174쪽)
(2) 사라지는 사람은 ‘착한’ 사람들
사진이 퍽 많이 실려서 현장 느낌을 살려 주는 듯한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은 뒤로 한참, 이 책에서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립니다. 지금 우리들이 보기에는 ‘사라져가는’ 무엇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사라진다’는 말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알맞지 않습니다.
이분들, “사라져가는 수공업자”며 “사라져가는 직업들”이라 묶여지는 분들은, ‘푸대접 받는’ 분들입니다. ‘따돌림받는’ 분들입니다. 늘 푸대접받고 언제나 따돌림받지만, 그러면서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당신 한길을 걸어온 분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어라 하건 말건 당신 스스로 보람을 느끼면서 울고 웃으면서 이어온 일입니다. 벌이가 많건 적건 스스로 기쁨을 맛보면서 집안살림을 꾸리고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쳐 온 일입니다.
.. 제대와 함께 복직을 했을 때다. 제과제빵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파리바게뜨’의 출몰은 소규모 제과점들을 한 방에 날려버렸고, 그 여파는 제과점을 상대로 경영을 해 온 밀탑까지 쓰러뜨려 버렸다 .. (54쪽)
사라지게 된다면 사라지게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다면 사랑받는 까닭이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에 실린 사람들, 세공사와 제과제빵사와 선박 수리공과 이발사와 철구조물 제작사와 자전거 수리공 들은 왜 사라지게 되는 사람들, 사라지게 되는 수공업자일까요.
이분들은 왜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밀려나거나 쫓겨나거나 내동댕이쳐지는 사람들, 수공업자가 될까요. 이분들 일은 어이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따뜻이 들여다보거나 따스히 감싸안는 일이 되지 못할까요.
.. “가위를 잡은 지는 오십 년째고, 이 가게에서 일한 지는 올해로 삼십칠 년째가 되는데, 손님 같지 않아. 밥상에 둘러앉은 식구 같아. 한 번 생각해 봐. 서른 중반부터 봐 온 얼굴들을 지금까지 봐 오고 있으니 이게 어디 주인과 손님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어. 계모임 하듯 한 달에 한 번은 보잖아.” .. (118쪽)
저로서는 어떤 학문이나 설문이나 통계나 자료조사로 이분들 삶을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다. 사회과학 풀이에 따라서 파헤치고 논문을 쓰고픈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이분들하고 똑같은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아가고, 늘 부대끼며, 크고작은 일마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자잘한 하루하루를 나누고 싶기만 합니다.
쉰 해째 머리깎이 하면서 살아가는 할아버지처럼, 저는 스무 해 가까이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봅니다. 떠꺼머리 때부터 뵈어 온 아저씨가 어느새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할아버지가 되었고, 열일곱 푸름이로 학교옷을 입을 때부터 뵈어 온 아주머니가 어느새 손주를 보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여드름이 겨우 가실 무렵부터 보았던 헌책방 할아버지는 어느덧 애 아빠가 된 저를 술동무로 여겨 책 구경은 그만하고 술잔이나 같이 부딪히자며 팔뚝을 잡아끕니다. 스무 해 가까운 세월, 적잖은 헌책방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여러 헌책방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기나긴 햇수에 걸쳐서 읽고 보고 사고 되팔고 되내놓고 한 책도 많지만, 눈빛 마주치면서 말없이 이야기를 나누어 온 횟수 또한 많습니다.
머리깎이 할아버지와 손님처럼, 헌책방 일꾼과 책손은 꾸준히 ‘계모임’을 합니다. 계모임을 할 때마다 당신들 삶이 달라지고 당신들이 낳아 기르는 아이들 삶도 함께 달라집니다. 계모임으로 어우러진 뒤 헤어지기까지는 고작 한 시간, 두 시간쯤일 텐데, 해가 갈수록 이 한두 시간이 기다려지고 바라게 되고 손꼽는 날이 됩니다.
.. 딱히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의 손만 타면 검푸른 쇳덩이는 눈부시도록 광채를 발산하는 것이다. 내심 걱정이 되는 건 그의 눈이었다. 집중을 요하는 작업일수록 시력이 빨리 망가진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시력검사를 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작업대에만 세 개의 형광등을 켜고 일하는 그는 요즘 들어 눈이 침침하다고만 했다 .. (38쪽)
사라지는 사람은 착한 사람들입니다. 잊혀지는 사람도 착한 사람들입니다. 밀려나는 사람 또한 착한 사람들입니다. 자취를 감추어 역사책이고 인문사회과학책 인용자료건 신문기사건 이름 석 자 적히지 못하는 사람 또한 착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오늘도 착한 사람을 만나서 착함을 배우고자 자전거를 몰고 길을 나섭니다. 칭얼거리는 아기는 옆지기가 돌봐 주기로 하고.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8.10.16 14:56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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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
박영희 지음, 강제욱 외 사진,
삶창(삶이보이는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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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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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사람은 수공업자 아닌, ‘착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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