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문학의전당
시인 한 사람 알고 지내면서 틈틈이 만나게 되면, 만날 때마다 시집 한 권 읽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시인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시인한테 몇 마디 듣고 이야기를 들어도, 또 물끄러미 시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시집 한 권 읽는다고 느낍니다.
그냥저냥 책만 읽고 살다가, 이냥저냥 책쟁이들만 만나고 살다가, 뜻하지 않게 시인과 어우러지는 자리에 끼게 되면,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말없이 찻잔이나 술잔을 들거나 말없이 사진기만 만지작거리게 됩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 거나해진 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앉히며 말했다 기왕에 가는 거 저놈에 달도 태우고 가자꾸나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대소쿠리만 한 달이 끼어 앉았다 셋이서 창영동 고갯마루 길을 달려 올랐다 (보름달 속으로 난 길)지난 7월 26일, 동네 헌책방 아주머니가 손수 나무질을 하여 마련해 놓은 조촐한 ‘시 다락방’에서 시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제 목소리를 제 빠르기에 맞추어 읽어 나가는 자리였는데, 이런 시읽기를 마친 뒤에 퍽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막걸리집으로 옮겨가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멀거니 떨어져서 사진만 찍었고, 어느 만큼 거리를 지키면서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여느 사람하고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고, 시인을 둘러싼 사람도 시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시를 쓰고, 다른 사람은 시를 즐길 뿐이었지요.
고양이 한 마리 사차선 도로를 횡단 중이다 화적 떼처럼 달겨드는 불빛파도를 헤치며 이리저리 발을 놓는 아찔한 곡예 귀가를 서두르는 차들은 좀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놈은 흰 차선을 보루 삼아 가까스로 生을 지켜내고 있다 이승과 저승이 한 線 위에서 흔들린다 놈은 목숨줄을 당겨 잡고 힘껏 뛴다 그러나 어느 자동차 속도의 칼날에 가차 없이 끊어져버리는 줄. 순식간에 바닥이 되어버린 놈을 上弦이 내려다본다 끝내 이르지 못한 길의 광고탑에 내 걸린 교통상해보험 현수막이 한 옥타브 높게 울어댄다 초저녁이다 (닿지 못한 길)
오늘 저녁,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당신 손주 돌잔치를 하는데, 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옵니다. 그러마 하고, 얼마든지 찍어 드립지요, 하는데, 같이 잔치자리에 가자면서, ‘우리 아저씨 오늘은 (택시) 운전 안 하고 술 드신다고 했는데, 술 드시지 말고 운전하라고 해야겠다’고 하시기에, ‘오늘 같은 날은 (택시기사인 분도 다른 사람이 모는) 택시 타고 가야지요’ 하고 말씀드립니다.
일삯을 안 받고 찍어 주는 돌잔치 사진이요 혼례잔치 사진이며 시읽는잔치 사진입니다. 벌써 석 달이 훌쩍 지나간 7월 끝무렵 시인 한 사람을 만나 찍던 사진도, 그저 부탁을 받으면서 찍는, 그러나 부탁만으로는 찍지 않고 나 스스로 그 시인을 마음에 담고 또 사진으로도 담고 싶어서 찍는 사진이었기에 늘 마음이 벅찹니다. 부풀어오릅니다.
시인은 시를 쓰고, 읽는이는 시를 소리내어 읊고, 사진쟁이는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사진기 단추 소리와 시 읊는 소리가 하나로 엮이고, 시인이 또박또박 적어내려간 글줄이 사진 한 장 두 장 올올이 새겨집니다.
반세기 동안이나 吳氏네 식구들을 품어온 집이 포클레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 기왓장들 밑에 엎드려 있던 침묵과 거기 기대어 허공 바라기 하던 담쟁이덩굴 담벼락의 소변금지와 밤 청춘들의 입맞춤을 눈감아주던 능소화가 일순 세상 바깥으로 쓸려나간다 길은 희미하다 먼지로 돌아가는 것들의 비명이 마을을 흔들어댄다 …… (다녀가다)시란 무엇일까, 사진이란 무엇일까, 글이란 무엇일까, 예술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문화란 무엇일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가운데, 시읽는잔치 사진은 이백 장 가까이 찍게 되고, 저녁나절 시디 한 장에 구워서 이튿날 우편으로 시인한테 부칩니다. 시인은 사진을 찍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며 당신이 손으로 이름을 적은 시집을 한 권 내어줍니다. 그러나 저는 벌써 제 주머니에서 돈 칠천 원을 꺼내어 당신 시집을 사서 미리 읽었는데.
손때 타며 읽은 시집은 한쪽에 꽂고, 손때 안 탄 말끔한 시집은 옆에 나란히 놓습니다.
(2) 사람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