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짐바브웨달러가 경제시장을 혼란시킨다는 내용의 짐바브웨 신문 <더 헤럴드> 머릿기사
김성호
전날 마스빙고로 오는데 내 옆 자리에 앉은 남자 승객도 “물가가 매일매일 오른다”고 걱정을 했다. 마스빙고에서 자전거 수리점을 한다는 30대의 중반의 남자는 하라레에서 자전거용 타이어를 여러 개 사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에게도 인플레이션에 대해 물어 “여행객에게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악마와도 같다”고 하자 웃는다. 나의 말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얘기이다.
내가 만난 모든 짐바브웨 국민들이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짐바브웨 국민들은 “인플레이션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 하라레의 힐사이드 롯지의 젊은 백인과 택시운전사가 말한 “여기는 짐바브웨다”라는 말이 모든 것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매일이 아니라 한 시간마다 물가가 오르고, 환율이 분마다 춤추는 현실을 “여기는 짐바브웨다”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 세계에서 짐바브웨 말고는 이런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전날 마스빙고로 오는 버스 안에서 산 영자신문 <더 헤럴드>지의 2006년 7월 27일자 머리기사도 인플레이션과 환율 관련 기사였다. 짐바브웨 달러가 지하시장에 은닉되어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이다. “수조원의 짐바브웨 화폐가 장롱 속에서 나오지 않고 전체 화폐의 15%만이 제도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바브웨의 전체 화폐 43조 달러 중에서 15%만이 제도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나머지 화폐는 가정집이나 사무실, 짐바브웨가 아닌 주변국가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경제가 비제도권 시장에 의해 왜곡되고 있고, 암시장과 같은 불법거래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요한 돈보다 유통되는 화폐가 적게 되면 경제를 질식시키면서 위기를 불러온다….”그런데 이 신문의 사설이 가관이다. “두개의 전선으로부터 경제회복을 꾀하라”라는 제목인데, 짐바브웨 경제위기의 첫 번째 원인으로는 외부적인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2005년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 그리고 국제금융기관의 짐바브웨에 대한 대출금지 등 불법적 제재를 들었다. 두 번째로는 내부요인을 들면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6차 의회 개회 오찬 기념사를 인용한다. “모든 사람의 이익, 즉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만을 쫓으려는 사례가 짐바브웨에는 너무 많다”고.
어용신문의 사설을 읽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디에도 무가베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와 장기집권으로 인한 부패에 대한 것은 없고 경제실패의 책임이 외부세계와 짐바브웨 국민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내용뿐이다. 한마디로 엉터리고, 신문의 기본사명이 건전한 비판이라는 기본적 책무를 저버리고 있다.1891년에 창간된 짐바브웨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이 이렇다.
무가베 정권은 이미 독립적 시각의 <더 데일리 뉴스>(The Daily News) 신문을 지난 2003년 폐간하는 등 언론을 완전 통제하고 있다. 어용신문과 어용방송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외국 언론의 특파원들도 내쫓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강제 언론통폐합과 양심적 언론인 추방, 보도지침을 통한 모든 신문과 방송 등 ‘전 언론의 어용화’가 20여년 뒤 짐바브웨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짐바브웨 신문에서 진실을 전하는 것은 ‘날씨란’밖에 없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기사와 사설 등이 모두 무가베 정권의 홍보로 가득하다. 어용신문에서도 가끔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더 헤럴드> 신문의 기사를 읽다보니 “2006년 6월 현재 인플레이션이 지난해 비해 무려 1184%”라는 내용이 나온다. 외국의 금융전문가들은 실제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은 이보다 훨씬 높은 3000~5000%라고 진단하지만, 짐바브웨 정부의 공식 발표 인플레이션만으로도 1184%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언론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 발전과 진정한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나는 더 이상 짐바브웨에서 신문을 사지 않았다. 여행객을 내쫓는 두 가지 요인은 치안과 인플레이션(환율) 문제이다. 케냐의 나이로비와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는 치안불안이 여행객을 내몰고 있었고, 짐바브웨는 인플레이션이 여행객을 떠나도록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