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에서 펴낸 <몽테뉴> 1~3권한길사
1998년 3월 나는 출간된 <고야>를 들고 다시 홋타 선생을 방문했다. 지난해 방문 때보다 선생과 부인, 그리고 서재의 책들에 더 익숙해졌다. 한국어판 <고야>를 살펴보는 그의 얼굴이 다소 상기되는 듯했다. 아마도 그의 책 가운데는 처음으로 번역된 한국어판일 것이다.
나는 선생의 서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거기에 홉스봄 선생의 <극단의 시대>가 놓여 있었다. 선생은 지금 그걸 읽고 있는 중이었다. 밑줄도 긋고 부전지도 붙여놓았다. 세계적인 지식인이자 작가인 홋타 선생은 역시 '독서인'이었다. 막 간행된 책을 이렇게 밑줄 그어가며 독서하는 원로의 넉넉함이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80년대부터 홉스봄 선생의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펴낸 바 있다. 홉스봄 선생은 1986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안암동의 우리 회사를 방문한 바도 있지만, 나는 그의 새 책을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후 <극단의 시대>의 한국어판은 까치에서 출간되는데, 그 방대한 책을 읽고 있는 거장의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미 그때 나는 홋타 선생의 또 다른 대작 <몽테뉴> 전3권의 출간을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는 1998년 5월에 출간되는데, 번역은 김석희 씨가 당연히 맡아 해주었다. 제1권: 전란의 시대, 제2권: 자연·이성·운명, 제3권: 정신의 축제로 구성되는 <몽테뉴>에서 홋타 선생은 말했다.
"세계는 소용돌이치고 있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의 세계인식은 심각한 진동에 휩싸여 있으며 종교개혁에 따른 혼란은 당장이라도 정치화하여 처참한 전란으로 치닫고 있다. 보편적 세계종교로 자타가 인정하던 로마 교회에 공공연히 저항하고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출현으로 유럽의 절대적 정신기반인 기독교에 균열이 생긴 전대미문의 사태! 이제 새로운 시대는 칼과 전쟁이 아닌, 지혜와 교양을 가진 인간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미셸 성의 고독한 은둔자이자 프랑스 왕정의 실력 있는 시종무관 미셸 드 몽테뉴! 그는 금욕주의와 회의주의, 쾌락주의적 천성과 스토아주의적 절제라는 양극적 영혼의 소유자였으며, 자연적 이성과 격정적 감성의 충만한 합일을 꿈꾼 자유주의자였다. <에세>라는 위대한 시대적 유산을 낳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는 극심한 내전의 혼란과 광분의 유혈전장 속에서 정신의 피뢰침을 높이 치켜들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한복판을 그렇게 건너갔다.
너무도 비극적이며 너무도 희극적인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노출된 그 시대는 이른바 '관절이 어긋난 시대'였다. 광분의 종교적 정쟁이 나은 유혈과 비이성이 이 역사 풍경화의 표면적 테제라면, 인간의 이성과 자유라는 인문주의의 거대한 태동은 이면의 안티테제다.
아, 역사에서 유혈만큼 빨리 잊혀지는 것도 없다. 인간의 피는 땅에 흡수되어 흙의 자양분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당시는 최악의 시대였고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도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몽테뉴의 찬란한 글은 같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량 살육을 저지르고 있던 군주와 귀족들은 상상도 못했던 사고의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정말 훌륭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 설령 시대가 최악이었다고 해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나는 책을 낼 때 저자의 말 또는 역자의 말을 대단히 중시한다. 때로는 머리말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작업의 맨 마지막에 쓰게 되는데, 독자들에게 주는 저작자들의 글이란 사실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 또는 역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책 속으로 그 저자에게로 다가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 선생의 '독자들에게' 또는 '책머리말'은 단연 압권인데, 번역자 김석희씨가 <몽테뉴>에 부친 '독자들에게'가 또한 그렇다.
역자 김석희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건 행운"
"대하(大河) 같은 책의 번역을 마치고, 그 끝자락에 도랑보다 못한 졸문 하나 덧붙이면서, 참으로 난감하고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사실 있으나마나 한 이 '역자후기'에 과연 무엇을 쓸 것인가. 책 <몽테뉴> 인가, '몽테뉴'인가, 홋타 요시에인가.
나는 벌써 며칠째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문득 이런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문학의 두 대가가 태산처럼 마주 앉아서 수작을 나누고 있는데, 그 사이의 깊은 골짜기 바닥에 가엾은 종자 하나 맥없이 주저앉아서, 메아리처럼 우렁우렁 오가는 소리에 귀마저 먹먹해진 채 두리번거리고 있는 꼬락서니.
십 년 넘게 번역에 종사해오면서 온갖 부류의 책과 저자를 만났지만, 이처럼 참담한 지경에 몰리기는 처음, 아니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먼젓번 경우도 하필이면 홋타 선생과 만나면서 겪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역자 김석희다. 진정한 역자 또는 인문주의 저술가라고 해야 할 김석희 선생을 그래서 나는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400년 저쪽의 몽테뉴를 불러내어 마치 친구를 대하듯 담소하며 이 평전을 써내려간 홋타 요시에는, 어쩌면 윤회의 업을 거듭한 끝에 다시 태어난 몽테뉴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둘이 하나라는 느낌은 나 혼자만의 인상이 아닐 것입니다. 몽테뉴의 내면을 살피는 홋타의 눈길은, 몽테뉴 자신이 아니고는 그렇게 섬세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자상합니다.
<에세>의 한 구절에서 몽테뉴의 전모를 이끌어내는 솜씨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필력 이상입니다. 홋타의 <몽테뉴>에는 한 인간에 대한 한 인간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인물을 하나의 '평전'에 담아내고 싶다는 작가적 충동 내지 호기심만으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정이나 존경심 이상의 것, 본연적 의미에서의 신앙과도 같습니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번역에도 더욱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내내 옷깃을 여몄던 것도, 두 위대한 작가가 만나는 자리의 한 귀퉁이에 끼어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행운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마니아 독자를 위한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