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건호 언론상 상패. 임옥상 화백의 작품이다.한길사
1975년은 언론인 송건호의 삶의 역정 또는 사상체계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기가 된다. 동아일보 사태가 이 땅의 현대사에 그 어떤 계기가 되듯이, 그 시대상황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지식인 송건호는 1975년 이후의 역사전개와 더불어 당대의 현실을 온몸으로 호흡하는 역사적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유신권위주의 정치권력이 내리막을 향해 달리는 그 시대상황에서, 일찍부터 '언론의 자유와 독립'을 한사코 신뢰하던 민족주의자 송건호는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면서 시대상황의 개혁에 앞장선 것이다.
한 지식인은 그가 몸담고 살아가는 그의 상황에 내던져짐으로써 그 상황의 구조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 상황의 구조를 극복하는 이론과 사상을 체득하게 될 터이다. 자유언론인 또는 민족주의자 송건호는 현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의 인식을 심화시키고 실천을 강화시키는 대기자 또는 당당한 언론인의 역할을 해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그는 잇따라 '문제저작'을 펴내는 '저자'가 되었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창비신서' 제8권으로 간행된 <민족지성의 탐구>에 이어 간행된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는 '해직 이후'인 1976년과 1977년에 주로 씌어진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해직 이후 더 본격적인 글들의 집필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민족노선', '신간회의 민족운동', '민족교육이념의 사적(史的)고찰', '사상사적으로 본 민족언론' 등이 그것들이다. 물론 '생활을 위한 글쓰기'이기도 했다.
그 1970년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젊은 우리들의 삶의 화두였다. 1978년에 나는 15인 에세이집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획한다. 동시대인들에게 주는 질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송건호 선생은 '상식의 길: 한 언론인의 비망록'을 썼다. 한 언론인으로서 그의 지향과 사상을 말해준다.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답변이라고 할까.
"우리 언론은 민족통일을 지향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민중에게 통일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민족언론은 남북 민족의 이질성보다도 동질성을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 민족언론은 민족의 자주·자립을 주장하며, 강한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에 불타 있어야 한다.
민족언론은 사회과학적 이론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사회과학이 바탕이 된 언론만이 민족의 현실을 옳게 인식할 수 있고,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한낱 재능인으로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언론인 송건호의 모든 탐구영역은 올바르고 가치지향적인 언론행위로 포괄된다. "신문기자는 민족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이며, 사상가로서의 자부심과 책임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 언론은 곧 역사이다. 그의 언론관에 일관되어 흐르는 정신과 이론은 '언론의 역사성'이다. 그러나 그의 역사성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죽은 역사가 아니라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면서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낸 이후 나는 송건호 선생을 매일같이 만났다. 유신권력이란 궁극적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게 된다.
1979년 10월 15일, 대통령 박정희가 측근인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10·26사건이 일어나기 11일 전에 '역사적인 한 권의 책'이 탄생한 것이다. 8·15 해방이 되었건만 자주독립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하게 되는 비극의 역사를 겪은 우리 현대사에 대해 나는 다시 묻고 싶었다. "왜 분단이 되었는가?" 흔히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분단되지 않고 자주독립할 수 없었을까? 나는 필자들에게 이런 문제들을 규명해보자고 했다.
이런 문제의식을 나는 송건호 선생에게 말씀드렸고 선생은 정말 좋은 구상이라면서 직접 한 편을 쓰겠다고 했다.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은 이렇게 해서 집필되는데, 나는 1979년 7월 초순에 넘겨받은 선생의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쳤다. 감동적인 논문이었고, 이런 수준과 내용의 글들이라면 자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송건호 선생의 많은 논설·논문 가운데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은 대표적인 글의 하나라고 평가하고 싶다.
"8·15하면 으레 해방을 연상하고, 또 어떤 시인은 이날의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는 노래까지 부르기도 했으나, 근래 와서 8·15란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를 회의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것은 틀림없었으나 해방의 날이라고 하는 바로 8월 15일을 계기로 국토가 분단되어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 분열로 말미암아 6·25라는 민족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동족상잔을 빚었다.
그 후 30년간 남북 간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막강한 군사력이 상호 대립하여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 통에 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그 대부분이 동족상잔을 위한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가운데 지루하고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민족이 이토록 비극적이고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이 땅의 학계에는 오늘의 분단 상황을 민족사의 높은 차원에서 반성하여 민족의 살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탐구하는 참된 의미의 민족적 고민의 흔적이 적고 고작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정통성 논의 등이 지배적인 것을 볼 때, 민족이 자기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닌 주어진 해방일 때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 글은 8·15가 주어진 타율적 선물이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 얼마나 일방적으로 요리되고 혹사당하고 수모받았으며 이런 틈을 이용해 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켰는가를 규명하려 한 것이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 윤리와 민족 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 격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마련이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런 여건 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반세기가 지난 8·15가 도대체 어떻게 민족의 정도(正道)에서 일탈해 갔고 그로 말미암아 민중이 어떤 수난을 받게 되었는가를 냉철하게 구명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구명은 결코 지난 역사의 구명이 아니라 바로 내일을 위한 산 교훈이 될 것이다. 8·15의 재조명은 이런 점에서 바로 오늘을 위한 연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역사의 길은 수난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