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단재상을 받은 고 이오덕 선생. 아동문학가인 이오덕 선생의 수상소감은 선생의 교육정신과 문학사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었다.한길사
1988년 제3회 단재상은 교육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에게 주어졌다. 한국사·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아니라 교육운동가이자 아동문학가에게 단재상을 주게 되었는데, 이는 단재상운영위원회가 이오덕 선생의 교육철학·아동문학론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시정신과 유희정신>(1977, 창작과비평사),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1977, 청년사), <삶과 믿음의 교실>(1978, 한길사) 등으로 아동문학과 어린이 교육운동에 새로운 문제의식과 방향을 제시한 이오덕 선생은 어떻게 보면 단재 선생의 정신과 실천에 참으로 일치한다고도 할 것이다.
'이오덕 선생의 교육이론과 문학사상'을 주제로 한 강평에서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은 "이오덕 선생을 단재상 수상자로 결정함으로써 단재상은 그 역사적 의미와 현실적인 실천의지를 더욱 넓혔다. 이오덕 선생의 교육관은 단재 선생의 반제의식과 직결된다"고 했다.
이오덕 선생의 수상연설은 선생의 교육정신과 문학사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협회 강당에서 열린 수상식에는 문익환 목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는데, 모두 이오덕 선생의 신념에 찬 수상연설을 경청했다.
"말이 근본이다. 글은 말에서 생겨난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글은 말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다. 글이 살아 있는 말이 아니고, 삶에서 우러난 겨레의 말법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글에서만 쓰는 말, 밖에서 들어온 말, 남들이 쓰는 말을 따라서 쓰는 글이 되었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은 무식하고, 생각이 얕다고 생각한다. 말을 떠난 글이 이제는 횡포를 부려 순수한 우리말을 쫓아내고 주인 노릇을 하면서 겨레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려 하고 있다. 즉 말이 으뜸이던 역사가, 글이 으뜸이 되어 말이 글의 지배를 받는 잘못된 역사가 되었다. 이제라도 어머니가 가르쳐준 말, 조국이 가르쳐준 말, 내 말을 도로 찾아 배워야겠다."
나는 이오덕 선생을 1980년대 초반부터 만나 이런저런 책을 기획했는데, 선생은 늘 우리말 우리글에 대해 말씀했다. 선생은 함석헌 선생의 말과 글을 높이 평가했다. 나는 이오덕 선생을 만나면서 계속 우리말 우리글에 대해 집필하시라 독려했고, 이렇게 하여 <우리글 바로쓰기> 전3권(1989)과 <우리문장쓰기>(1992)를 출간하게 된다.
<우리말 바로쓰기>와 <우리문장쓰기>는 선생이 저술한 수많은 책 가운데 불후의 명저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인권변호사 조용환씨는 언젠가 나에게 말한 바 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못지않게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가 중요한 책이라고.
그 어떤 한글학자·국어국문학자보다 선생의 우리말 우리글 운동은 80년대 90년대의 역사변혁기, 우리정신 우리 사상을 바로 찾아가는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고, 그런 차원에서 단재상이 이오덕 선생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자 참 선생'
1986년 제4회 단재상은 김진균 서울대 교수(사회학자)에게 주어졌다. <사회과학과 민족현실>(1988, 한길사)의 저술뿐 아니라 80년대 학술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식인·학자로서의 실천이 높이 평가받았다.
<사회과학과 민족현실>은 그의 1980~1984년 해직교수 시절에 구체적으로 체험한 삶에서 우러나온 저술이었다. 이종오 계명대 교수는 김진균 교수를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자 참 스승"이라고 축사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한국지식인의 창조성과 역사성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며 그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김진균 교수를 내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980년 '지식인 134인 선언'과 관련되어 해직되었지만, 한국산업사회연구회 초대회장, 청년학교 교장, 4월혁명연구소 소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 등을 맡아 80년대 학술운동·지식인운동을 선도했다. 나는 김 교수를 1980년 3월 22일 오후 서대문 네거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해 '서울의 봄'에 선생은 서울대 학생들과 함께 '민주화 행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이후 한길사가 펴내는 무크지 <한국사회연구>의 편집위원과 1985년부터 전개된 '한길역사강좌' 등에 참여하면서 우리와 함께 여러 일을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86년 8월 안동 병산서원에서 열리는 한길사 10주년 기념 '지식인 대토론대회'에 주제를 발표하기도 했다.
늘 '큰형'같이 편안했던 선생은 해직시절 안암동 우리 회사를 늘 방문하곤 했는데, 일이 끝난 후 우리 직원들과 함께 종로2가에 있던 고고클럽을 가기도 했다. 선생은 2004년 2월 15일에 별세했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단재상 수상연설을 통해 김 교수는 '자본주의와 공동체적 삶'이라는 주제로 '민중에 기초하는 민족의 사회과학'을 제창했다.
단재 선생의 위대한 민족정신을 되새기는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