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선생의 단편소설 <변명> 첫 페이지. 이 작품은 이병주 전집 중 <마술사>에 실렸다.한길사
이병주 선생은 <문학사상> 1972년 12월호에 단편소설 '변명'을 발표했다.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의 미완의 명저 <역사를 위한 변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참으로 이병주적인 작품이다. "나는 그 제목에 마음이 끌렸고, 그 내용에 감동했고, 그의 생애를 알고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이르렀다"고 작가는 말했다.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다가 1944년 58세로 나치스에 의해 총살당한 마르크 블로크와 <역사를 위한 변명>을, 나는 이병주 선생의 소설 '변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1960년대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닌 나에게는 '역사'란, 우리 시대가 탐구하고 성취해내야 할 정신·사상·교훈 그리고 희망을 총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강렬한 메시지 같은 것이었다. 다른 동시대인들도 그러했겠지만, 나는 단재 신채호 선생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자와 민족주의 사관에 경도되어 있었고 이들의 책들을 읽었다.
식민지시대와 분단과 전쟁으로 이 땅에서의 역사적 삶은 참으로 고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같은 우리 현대사의 성격과 정체를 규명하는 한 준거로 우리는 민족주의사관을 선택했다. 민족주의사관을 지닌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정신과 행동은 비수같이 우리들 가슴에 꽂히는 감동이었다.
1979년 12월 한길사가 번역 출간한 <역사를 위한 변명>(정남기 옮김)은 아마도 그 고단한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신뢰 또는 희망 같은 걸 심어주었을 것이다. '역사'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변명'의 행간에서 읽어내려 했을 것이다.
이병주 선생의 소설 '변명'에서 만난 마르크 블로크
마르크 블로크는 1886년 7월 프랑스의 리옹에서 로마사를 전공하는 아버지 귀스타브 블로크와 어머니 사라 엡스타인 블로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계와 모계 양쪽에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이들 집안은 프랑스혁명기에 유대인 해방법이 발표된 이래 유대교의 폐쇄적인 전통에 집착하지 않고 공화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프랑스 시민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사랑하는 시민이며 애국자였다.
블로크는 1904년 아버지가 다닌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과 지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1908년에는 역사학·지리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5년 입대하여 대위로 진급되었다. 제대 후 1919년부터 1936년까지 당시 프랑스 동북부의 새로운 학문적 중심으로 떠오르던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로 재직하는데, 필생의 학문적 동지였던 뤼시앵 페브르를 여기서 만나게 된다.
1922년에 페브르와 더불어 <사회경제사연보>, 통칭 <아날>지를 창간하여 역사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고, 1931년에는 <프랑스 농촌의 기본성격>을 발표하여 학계에서 사회경제사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그리고 1939년부터 1940년까지는 앙리 베르가 기획한 '인류의 진보' 총서의 일환으로 <봉건사회>를 저술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흔들림 없는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