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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바람이 부는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바닷가. 두 평 남짓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적막만이 흐른다. 오로지 들리는 소리라고는 굴을 까는 소리와 할머니들의 긴 한숨소리만 들린다.

 

"기름사고 이전에는 우리 양식장이 있어 쳐다보지도 않았어. 관광객들이 심심풀이로 쪼아 먹도록 남겨둔 석화굴을 주어서 까고 있는데, 이것마저도 동네 사람들이 서로 주으려고 해서 오늘은 이것도 없어서 못 까네...."

 

"기름사고 이전에는 하루에도 수십만원 벌던 동네 젊은 사람들이야. 올해에는 3만5천원짜리 희망 근로 사업도 서로 참여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로 희망이 안보여....."

 

태안반도를 일순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빠트려버린 삼성크레인과 허베이스트리트호의 원유유출사고가 벌써 2년을 맞고 있다. 지난달 29일 비닐하우스에서 연신 굴을 까고 있는 할머니들 사이에서 가재분(63)씨를 만났다.

 

꼭 일년 만에 다시 얼굴을 본 가재분씨는 지난 원유유출사고 이후 평생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던 굴 양식장이 하루 아침에 망가진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앓다 끝내 죽음을 선택한 고 이영권 선생 부인이다.

 

지난해 겨울 사고 일년을 맞아 의항리를 찾았을 때도 동네 아주머니들과 굴을 까고 있었다. 올해도 사고 2년을 맞아 다시 찾은 의항리 해변가 비닐하우스에서 변함 없이 연신 굴을 까고 있는 가재분씨를 만났다. 지난해보다는 얼굴이 좀 나아보이는 가재분씨.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지난 일년을 물어보니 금방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로 "좀처럼 나아진 것이 없어"라고 짧게 답한다.

 

지난 일년 동안 한 것이라고는 국립공원에서 실시한 생태계 복원 사업에 참여한 것과 최근에 그것도 면사무소에 가서 사정과 떼를 써서 참여한 희망근로 사업이 전부란다.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데 생계를 위해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해야 하는 심정을 모를 거야."

 

사고만 안났어도 영감하고 매일 양식장에 가서 굴을 따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살아갔을 가정이 기름사고 때문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화가 난다는 가재분씨.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지금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몇 날인지 모른다는 가재분씨. 지난 2008년 11월 만났을 때 둘째 아들을 꼭 이듬해 장가를 보내고 싶어하던 가재분씨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올해 피해 배·보상이 나오면 둘째아들을 장가 보내려고 했는데 어찌던 일인지 피해 조사를 해가더니 감감 무소식이다.

 

결혼은 고사하고 지난 일년동안 세금이라도 안 밀리고 간신히 산 것은 생태계복원 작업을 한데다, 희망근로 작업이 없는 날 날품을 하고 바닷가에서 아침·저녁으로 굴을 주워서 버텨왔기 때문이다. 그마저 오늘 굴을 까면 이 굴도 이젠 없단다.

 

게다가 11월 30일로 희망근로 사업도 끝난다. 그야말로 올핸 지난해보다도 더 어려운 겨울이 될 판이다. 돈을 아끼려고 보일러도 안틀 작정이란다.

 

지난해 뒤돌아보면 둘째 아들 장가는 고사하고 아이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만 하고 살았다. 좀처럼 형편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버틸 힘도 희망도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년에는 둘째 아들 꼭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기자 양반 피해 보·배상은 언제 나오는 거야."

 

가재분씨를 비롯한 의항리 주민들 아니 태안 피해주민들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피해 보·배상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형편이다.

 

작업을 하다가 김, 배추김치, 파김치 세 가지 반찬으로 10여분 만에 점심 식사를 하고는 또 굴을 까는 가재분씨. 하루 종일 까면 10kg 정도다. 이 굴까는 작업도 오늘이면 끝이다.

 

"오늘이 지나면 마을 전체가 할 일이 없어져... 근데 말일이니 또 각종 세금 고지서는 날아올테고....올 겨울을 버틸 재주가 없네, 우리들의 이러한 형편을 안다면 생태계 복원 사업이나 희망근로 사업을 겨울에도 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입니다."

 

기름 사고만 없었으면 가재분씨는 남편과 함께 자신들 굴 양식장에서 작업을 하면서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정의 행복을 빼앗아간 사람들은 2년이 다 되도록 적절한 배·보상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덧붙이는 글 | 바른지역언론연대 태안신문에도 실립니다. 태안기름유출사고 2년 특집 시리즈입니다.


태그:#태안기름유출사고2년, #태안, #의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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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하는 태안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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