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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새로 당을 맡게 된 김근태 당의장이 연일 서민경제 회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김 당의장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글이 길어 요약해 게재합니다. 원문은 파일로 첨부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편집자주>
▲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취임후 처음으로 열린 13일 의원총회에서 "지금 상황이 어려워 서로 네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지만, 단합해야 한다"고 `단합론`을 재차 강조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FTA라는 환상

당의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다 붙이니 영 딱딱하군요. 하지만 많은 분들과 함께 읽는 편지라 생각하고 사적인 얘긴 되도록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정부의 한미 FTA 추진이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매체에서 얘기를 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수출과 투자에 대한 효과는 미미하거나 나쁜 쪽으로 나타날 것이고 양극화는 극단으로 진행되리라는 겁니다. 이 점은 나프타 12년 동안 멕시코에서는 마킬라도라효과에 힘입어 그나마 수출과 외국인투자가 급증했지만, 살리나스 전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한 것과도 대비되는 것이죠.

나프타를 맺은 세 나라 모두 제조업 생산성은 올라갔지만 실질임금은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경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나프타 이후에 전체 국민소득은 증가했겠지만 노동자들에게 돌아간 분배몫은 줄어들었다는 걸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생산성 향상이 많은 나라일수록 실질임금 하락이 더 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고용없는 성장'이 이뤄졌고, 그리고 그나마 증가한 고용도 '질이 낮은 고용, 예컨대 비정규노동'으로 채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라 안의 지역간 격차,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간 격차는 더욱 심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97년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고, 또 김의장께서 강조한 '서민경제'의 어려움도 바로 이 때문이니까요.

<그림1> 제조업 생산성과 노동비용
연간 누적 변화율(%, 1993년 - 2002년 6월)
자료: J.W.Foster and J.Dillon, "NAFTA in Canada : The Era of a Supra-Constitution", KAIROS,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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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이데올로기적 주장들

한미 FTA에 관한 한 청와대의 국정브리핑과 이른바 <조중동>(그리고 한나라당)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대통령께서 그토록 원하던 '대연정'이 실질적으로 이뤄진 셈이죠.

우선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한말의 쇄국론자로 모는 주장부터 기가 막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의 무역의존도는 70%에 달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럽의 몇몇 소국을 제외하곤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 그리고 무역의존도가 높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일본이 10% 후반대에서 20% 초반대를 오르내리는 것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숫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자는 것이 쇄국이라뇨? 쇄국이란 말 뜻을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세계의 FTA 체결 현황을 볼 때 중남미 나라들은 평균 7개, 아프리카 나라들은 평균 5~6개, EU가 평균 3~4개, 동아시아 나라들이 평균 2개의 FTA를 맺고 있습니다. 1인당 경제성장률이 낮을수록 FTA를 많이 맺고 있다고 주장해도 무방합니다. 적어도 FTA의 개수와 경제성장률은 전혀 무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1개의 FTA를 맺은 선두주자 멕시코가 무역수지 적자와 낮은 성장률에 시달리다 결국 FTA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걸 박 차관이나 경제보좌관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요?

나라가 미국과 가까운 덕에, IMF가 요구한 개방화·자유화를 통해, 그리고 그 완성태로 미국과의 FTA를 통해 미국형 경제시스템을 백분 받아들인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국가들 간 성장률 격차의 확대를 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까요?

미국 FTA의 특징 - 상대 나라의 제도와 법을 다 바꿔라

▲ 자료: Penn World Tables, EPI issue Brief(Oct. 2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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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국민은 물론, 정치권이나 심지어 경제학자들도 FTA에 관해 잘 모르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약 200여개의 FTA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제로 WTO규정('실질적으로 모든 교역의 개방')을 만족시키는 것은 1/10도 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FTA는 우리도 수없이 맺고 있는, 특정 분야에서의 경제협력협정에 불과하고 따라서 구속력도 약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그러니 이런 숫자에 현혹되어 초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FTA는 다릅니다. 미국이 양자간 FTA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입니다. 우루과이라운드로부터 시작된 다자간 협정이 지지부진하고 한편으로는 EU 등 선진국, 다른 한편으로는 개도국들의 반대로 자신들의 주장이 쉽사리 관철되지 않는 가운데, 야심적으로 밀어붙인 FTAA(전미자유무역협정, 나프타를 중남미 국가들에게까지 확대하려던 것)가 수포로 돌아가자 당시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였던 로버트 죌릭(현 국무부 부장관)은 '경쟁적 자유주의(competitive liberalism)'를 들고 나옵니다.

미국은 나프타를 통해 '상대방 나라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지지하고', '각종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겁니다. 즉 미국 FTA는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개방화, 민영화, 금융긴축)를 상대국에 압박하는 수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앞에서 IMF 구제금융과 나프타의 효과가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만, 죌릭은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죠.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 발표된 미 의회의 CRS보고서(5.24)는 한국과의 FTA가 ‘경쟁적 자유주의’의 시범 케이스라고 못박고 있습니다(p6).

또한 미국의 FTA 정책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FTA, 즉 나프타보다도 더 포괄적이고 강한 FTA를 하는 겁니다. 이들은 한미 FTA에서 최초의 요소들(generic elements)을 도입하겠다, 즉 여태 구경도 못한 혁신적 조항을 담겠다고 강조합니다. 미국이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이른바 신이슈로 알려진 무역관련 지적재산권(TRIPS), 무역관련 투자(TRIMS), 서비스교역(GATS)입니다.

미국이 신이슈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 미국 산업이 이 세 분야에서 압도적 경쟁력 우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것만 해도 서비스교역에 WTO의 포지티브 리스트(명시한 분야만 개방)이 아니라 네거티브 리스트(명시하지 않은 분야는 모두 개방)를 적용한다든가, 무역관련 투자 조항을 나프타 이상으로 강화하는 것, 지적재산권의 보호 연한을 20년 연장하는 등 가히 충격적인데 이 외에 뭔가 '혁신적인 것'이 더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투자에 관한 장은 민주주의를 말살합니다

이들 항목을 낱낱이 지적하는 건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투자에 관한 장(chapter)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나프타 플러스로 알려진 한미 FTA의 투자에 관한 장은 공개되지 않았으니 여기서는 나프타를 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단도직입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투자에 관한 장은 '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입니다. 작은 따옴표 안의 주장은 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해 당사자라고 할 수도 있는 미국의 시민단체(pulblic citizen, 저 유명한 랄프 네이더가 시작한 단체입니다)가 만든 보고서의 제목입니다.

나프타 11장은 온갖 독소조항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돈되는 대상이라면 공기업이든 공공서비스든, 아니면 '투기'든 광범위하게 인정한 투자의 정의, 투자 계획 때부터 내국민 대우를 해야 한다는 조항, 수용(expropriation), 나아가 수용에 해당하는 행위(measures tantamount to expropriation)를 현존하는 어느 법률보다도 관대하게 정의한 조항,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업이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권리 등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입니다.

초국적기업의 투자 보장을 넘어 이윤 보장을 꾀하는 이러한 조항을 다자간 투자협정(MAI)에서 관철시키려다 프랑스 등 EU 나라들의 반대로 좌절하자, 이것을 FTA에 적용하여 전범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도 전파하려는 것이 바로 나프타로 시작한 미국 정책의 핵심입니다.

진정 '서민경제'의 회생을 원한다면 한미 FTA부터 막고 볼 일입니다.

한미 FTA는 명백하게 양극화를 심화시킬 겁니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며 사회권 등의 규제를 완화하고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면, 또 가뜩이나 심각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극까지 추구된다면 사회적 약자들에게 피해가 집중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더구나 기업이 정부의 제도를 대상으로 제소를 하고 그 판결을 제3의 민간기구가 비밀로 처리한다면 우리 국민의 주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겁니다.

김 당의장이 말하고 있는 서민경제의 회생이란 결국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심화일 겁니다. 그런데 한미 FTA는 바로 그 민주주의 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어떤 무엇보다도 한미 FTA를 저지하거나, 천보 만보 양보해도 투자에 관한 장전체를 삭제하거나 최소한 기업의 정부 제소권은 삭제해서 EU처럼 정부와 정부가 분쟁을 처리해야 합니다. 한껏 양극화를 조장하고 나서 이를 다시 증세로 치유하겠다는 건 정말 바보 짓입니다.

모든 걸 시장에 맡기면 해결된다는 시장만능론은 잘 아시다시피 원래 한나라당의 전유물입니다. 특히 한미 FTA는 '재벌-고급경제관료-<조중동> 등 보수언론'이라는 '3각 동맹'이 자신의 사익을 위해 적극 추진하는 정책입니다. 한미 FTA는 단순한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시스템 개조를 부르는 정책기조입니다. 엄청난 부작용을 몰고 올 외부쇼크요법을 노무현 대통령이 대신 써 준다 하니 한나라당 처지에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열린우리당을 포함해서, 이른바 '개혁세력'이 살려면 단호하게 한미 FTA를 저지해야 합니다. 다음 대선의 구도가 한미 FTA 찬반의 정책 논쟁, 그리고 그 외에 서민경제의 회복 방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짜일 때 비로소 한나라당이 거저 정권을 줍는 불행의 길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그것이 김 당의장 등 당 지도부, 이보다 훨씬 외연이 넓은 범개혁세력이 살 길입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이 궁지에서 벗어날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 살 길을 놓아 두고 왜 죽을 길을 찾아 드는지 저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추가성장이 필요하다, 한국형 신자유주의를 모색한다는 의장의 말씀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는 건 제가 지금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기 때문이겠죠.

▲ 정태인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 보기에 당의장께서는 근년에 항상 두 박자 쯤 뒤늦은 결정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이미 한 박자는 놓쳤습니다. 이제 결심을 할 시기입니다. 좌고우면, 더 이상 미룰 시간이 없습니다. 연말까지 한미 FTA를 졸속으로 해치우려는 세력, 더구나 EU 등과의 FTA까지 도박에 가까운 '동시다발적 FTA'를 추진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정부 안팎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개혁세력이라 부르든, 아니면 민주화세력이라 하든 기나긴 동면을 하면서 추억 속의 훈장만 만지작거려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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