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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에 대한 신념

나는 1990년대 중반부터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 매월 1만원씩 '북한동포돕기' 성금을 보내고 있다. 또 몇 년 전부터 천주교대전교구의 황용연 신부가 만주 연변지역의 땅 30만 평을 임대하여 해마다 감자 농사를 지어 북한에 보내 주는 사업에도 매월 1만원씩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평화3000'에도 참여하여 매월 3천원씩 후원회비를 내고 있다.

'평화3000'은 천주교의 성직자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2003년에 창립한 사단법인 단체로서 대북지원, 남북교류, 평화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오고 있다. 기원 후 2001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미래 1000년의 평화를 지향하고, 민족의 힘으로 한반도 3000리에 평화의 씨앗을 심고, 이 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이 매월 3천원씩을 평화 기금으로 나눈다는 뜻이 '평화3000'이라는 이름 안에 담겨져 있다.

나는 대북지원 민간단체들에 참여하여 적게나마 성금이나 후원금을 보내면서 북한의 독재왕조 체제를 도와준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오로지 기아와 고통에 신음하는 북한동포들을 돕기 위한 일이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북한의 독재 체제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사시(斜視)들이 우리 주변에 많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냉혈동물이 아닌 이상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으며,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변화의 시대를 만들어 가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추구해 가야 하는 이 시기에 어떻게 뒷짐지고 구경만 할 수 있는가.

▲ 평양 순안공항 풍경
ⓒ 지요하
'평화3000'의 일원으로 지난 13일 평양을 방문했다. 13일 아침에 갔다가 14일 저녁에 돌아왔다. 원래는 2박3일 일정이었으나 9월 26일부터 10월 15일 사이의 방북희망단체가 갑자기 많아지고 인원도 5천 명 선에서 7천 명 선으로 대폭 늘어나면서 수용 능력에 한계를 느낀 북측의 요청에 따라 모든 방북 단체들의 일정이 1박2일로 축소 조정되었다.

아쉬운 감이 없지 않지만 좀 더 많은 이들이 평양을 보고 올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2박3일 일정을 1박2일 안에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특히 '평화3000'의 집행부는 많은 애를 썼다.

13일에는 '주체사상탑', '만경대', '만경대소년학생궁전'을 둘러보았고, 저녁에는 '5·1경기장'에서 '아리랑 잔치' 공연을 관람했다. 그리고 14일에는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과 천년 사찰인 보현사를 구경하고 저녁 비행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양각도호텔 식당 풍경
ⓒ 지요하
평양에 가기 전부터 주변에서 좋지 않은 말들을 많이 들었다. "김정일에게 돈 보태 줄 일이 있느냐"라는 빈정거림에서부터 "조선노동당 창건 60돌 기념행사에 축하를 해주러 가는 것 아니냐"라는 추궁이며, 심지어는 "북한에 가는 것들은 다 빨갱이 사상을 가진 놈들"이라는 극언까지 들었다.

지금 세상에도 수십 년 전의 '빨갱이 타령'에서 한 발짝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남북교류는 더욱 확대되고 지속되어야 할 통일운동의 요체라는 사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보고 오는 것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는 신념을 안고 방북 길에 오를 수 있었다.

평양에서 가진 일차적인 느낌들

▲ 주체사상탑 광장에서 북측 여성 안내원과 함께
ⓒ 지요하
인천공항에서 평양의 순안공항까지 1시간 20분이 걸렸다. 그것은 비행기가 휴전선을 넘지 못하고 수원 상공까지 내려왔다가 서해 공해상의 항로를 날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접하게 된 평양은 순안공항의 풍경부터 내게 다소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순안공항 주변에 아스팔트 길은 한 가닥뿐이었고, 차량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순안공항은 너무도 한적하고 초라했다. 남한의 가장 작은 지방공항보다도 못한 모습이었다.

나는 이틀 동안 평양의 풍경들을 보고 또 묘향산을 가고 오면서 참으로 큰 슬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모순'과 '이율배반'이라는 단어를 무겁게 안아야 했다. 인민들의 실생활과 북한의 지배권력이 꾸미고 보여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극과 극이 존재하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느끼고 간파할 수 있었다.

▲ 만경대에서 석일웅 수사(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장상연합회 사무국장, 가운데)와 권태하 작가(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와 함께
ⓒ 지요하
200만 명이 산다는 북한의 수도이며 최대 도시인 평양의 거리들에 '신호등'이 없었다. 평양 거리를 오가는 차량들의 수는 우리 고장(충남 태안) 읍내를 메우는 차량보다도 적은 것 같았다. 차가 많지 않으니 신호등은 아예 필요 없을 것 같은 중심지 거리에서 교통 신호를 하는 제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다. 간혹 2층버스가 보이기는 했지만, 타이어를 단 낡은 '무궤도전차'와 '궤도전차'들이 대중교통의 중심을 이루는 풍경은 과거 시절의 '정지' 상태를 느끼게 했다(이 교통 상황과 관련하여, 원래 예정되었던 '평양 지하철 시승'이 일정에서 빠진 것이 큰 아쉬움을 준다).

평양의 밤은 어두웠다. 거리들에 가로등이 없었다. 가로등이 있는 거리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큰 건물들도 대부분은 불이 꺼져 있었다. '양각도호텔'의 맨 꼭대기 47층에 있는 '회전식당'에서도 평양의 야경을 볼 수가 없었다.

▲ 만경대소년학생궁전의 안내원 소녀
ⓒ 지요하
양각도호텔 47층의 그 스카이라운지는 전체가 서서히 회전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회전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시나브로 움직이는 속도 때문이 아니었다. 야경이 없는 도시 안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지구상에서 신호등과 가로등, 네온사인과 아경이 없는 수도(首都)가 평양말고 또 있을까.

평양이 그러하니 다른 곳들은 어떻겠는가. 평양의 일반 주민들의 모습은, 그리고 묘향산을 가고 오며 본 시골 풍경은 마치 만주 연변을 보는 것 같았고, 남한의 60년대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지배권력이 축조해낸 드높은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외국인들에게서 받은 26만 여 점의 선물들을 전시해 놓은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의 웅장한 모습이며, 5·1 경기장 안에서 10만 명이 연출하는 '아리랑' 공연의 화려찬란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기묘한 언밸런스에서 오는 곤혹스러움 속에서 나는 한없는 착잡함과 슬픔을 안아야 했다. <계속>

▲ 만경대소년학생궁전 마당의 조각상
ⓒ 지요하

▲ 공연을 마친 만경대소년학생궁전 공연단에게 꽃다발을 주는 남측 방문단 대표들
ⓒ 지요하

▲ 민족식당에서 저녁식사 후 여성 접대원들과 함께
ⓒ 지요하

▲ 양각도호텔에서 본 평양의 아침 풍경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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