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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가난으로 내몰린 이웃들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끝내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이를 자살이 아닌, '사회적 살인'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온 열다섯 소녀가장이 온몸으로 가난과 싸우다 결국 스스로 목을 맨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한다. 언론 귀퉁이에서조차 조명을 받지 못한 그녀의 짧고 슬픈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동시대인으로서 우리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과연 아무 것도 없었나....편집자 주)



▲ 정양이 자살하기 직전에 쓴 유서 5장.
ⓒ 오마이뉴스 조호진

"나는 우습게도 소녀가장이었고,
아버지도 안 계시는 불쌍한 아이였다.
고등학교 입학금조차 없는 가난한 집의 둘째였다.
이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에 사는 정아무개(평택H중 3학년)양이 생활고를 비관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지난 22일.

어머니 정아무개(45)씨는 당시 상황을 "빚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오후 9시경 돌아와 딸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방문이 잠겨 있었다"며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딸이 목을 매 숨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정양은 이날 학교 선생이 준 음료수를 가지고 와 막내 여동생 희아(가명·초등3학년)에게 주면서 "엄마 말 잘 들어, 나 잘 테니까 소리가 나더라도 깨우지 마라"고 부탁한 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목을 맸다.

"일본어도, 컴퓨터도, 음악도, 기타도 배우고 싶다"

정양은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보이는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유서를 남겼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이 학생은 유서에 가족과의 갈등, 가난에 대한 절망, 친구에 대한 고민, 꿈에 대한 애착 그리고 어머니와 자매에 대한 사랑을 썼다.

정양은 유서에서 "차라리 고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이라며 "내게 미래란 보이지 않는다, 태어날 땐 내 의지로 태어나지 못했으니까, 죽을 때라도 내 의지로 할 수 있다면…"이라고 써 자신의 처지를 심하게 비관한 것으로 보인다.

정양은 죽기 직전, 삶에 애착을 가지면서도 꿈을 펼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는 유서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하고 싶은 건 많다.
일본어도…. 독학이지만 계속하고 싶고,
체계적으로 컴퓨터도 배우고 싶고,
음악이나 기타도 배우고 싶고, 하고 싶다.

사랑하는 엄마….
미안해, 이런 생각 자체가 불효라는 것… 알아.
하지만 어쩌면 내가 없어지는 게 더 다행일지도 몰라.
우습지만 돈도 덜 나갈테고,
엄마 힘들게 하는 작은딸이 없으면
더 편할지도 몰라."


그리고 정양은 유서에 "내 소원은…, 내가 운전하는 차에 엄마 태우고 드라이브하는 거였어…"라며 "나 되게 겁쟁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라는 소망을 남긴 채 끝을 맺었다.

객사한 아버지… 뇌종양에 걸린 어머니

어머니는 빚을 얻으러... 정양은 사진 안쪽의 작은방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스스로 목을 맸다.
ⓒ 오마이뉴스 김도균
객사한 아버지와 뇌종양에 걸린 장애인 어머니…. 정양은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0만원의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

정양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소녀가장이 됐다. 연탄배달과 여관 청소원, 식당종업원 등으로 생계를 잇던 어머니가 지난 98년 뇌종양으로 쓰러지면서부터였다.

정양의 어머니는 그 후로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비 60만원으로는 자신의 치료비로도 부족해 4천만원 가량의 카드 빚을 지고 있었다. 정양의 아버지는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다 지난 2002년 7월 심장병으로 숨졌다.

정양의 꿈은 디자이너. 정양의 담임교사는 "정양이 홈페이지를 만드는 솜씨와 독학으로 배운 일본어 실력과 글쓰기 실력이 뛰어난 총명한 아이였다, 용돈을 아껴 참고서를 사는 등 어려운 환경에도 학업에 충실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말했다. 정양은 성적이 평균 80점대로 초등학교 시절에는 사회단체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정양은 집안의 기대주였다. 그런 만큼 정양은 평소 부채문제와 가족부양 등으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입학금 마련 등의 고민을 홀로 감당하면서 심적인 고통이 컸던 것으로 유서에 나타났다.

디자이너의 꿈, 일본어 실력과 글쓰기 실력이 뛰어난 총명한 소녀

정양은 오래 전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친구와 동생들에게 1년 전부터 자살하는 방법을 묻는 등 자살을 암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부도 잘하고, 노래와 춤을 즐기던 활발한 정양이 자살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정양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가 친구들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했다. 정양은 유서에서 "나를 알게 되면 (친구들이) 도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감싸고 상품처럼 만들어 버렸지"라며 "명랑하고, 밝고, 착한 또 하나의 나를… 진실한 나를 알고 있는 건 아무도 없다"고 괴로워했다.

정양은 현실의 괴리감을 못견뎌했다. 유서에서 "당장 낼 학비도 없는 주제에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게 우습다. 난 모순덩어리다"면서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다 말하는 주제에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도 없다"고 자학했다.

교사들의 관심조차도 부담스러워했다. 정양은 유서에서 "(교사들의)관심이란 건 때로 화나는 거니까… 정말 관심을 받고 싶었을 때… 정말 힘들었을 때는 무관심이었다"고 반감을 표시했다.

담임교사 류호석씨는 수경 양이 "학생부장을 하겠다고 손을 들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며 친구들과도 밝고 명랑하게 지낸 아이였다"며 "죽고 난 뒤 수경이의 일기를 읽었다. 절망과 희망으로 갈등하던 수경이가 끝내 어떤 것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류씨는 이와 함께 "수경이가 지난 2월부터 친구들에게 '나 죽으면 울어줄래'라고 말했지만 이를 장난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뒤늦게 들었다"며 "수경이의 견디기 힘든 고통을 몰랐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크다"고 괴로워했다.

소녀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고 치료 받을 수 있어야"

마지막 밥 정양은 밥 한솥을 해 놓은 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다.
ⓒ 오마이뉴스 김도균
정양은 전기밥솥 가득 밥을 해놓은 뒤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두 여동생에게 마지막 밥을 해놓고 세상을 떠난 소녀가장의 유해는 지난 25일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강물에 뿌려져 서해바다로 흘러갔다.

정양의 장례는 학교·동사무소·경찰 등의 기관을 비롯해 공부방 '열린교실' 관계자들에 의해 치러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정양을 가르쳐온 열린교실 교사들이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맡았다. 이들 교사들은 "정양이 너무 불쌍해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H중학교는 재단 차원에서 정양 가족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동 주민자치위원회 등이 성금모금에 나섰으며 일부 학부모들이 수경양과 같은 여중에 다니는 여동생 희수(가명·여중2년)의 학비후원을 자청하는 등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어머니 정씨는 "병이 들지만 않았으면 딸을 잃지 않았을 텐데… 옆방에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자꾸 부른다"라며 "어디 다 내놔도 예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고 우리 가족의 전부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여동생 희수는 생전에 언니가 "나 없으면 설거지하고 밥 어떻게 해 먹을래. 자꾸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며 "언니한테 무관심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언니 몫까지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막내 여동생 희아는 언니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평택경찰서 이칠로 형사는 30일 "한창 꿈을 꾸어야 할 어린 소녀가 돈걱정에 시달리다 자살한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유서 내용이 너무 애절해 형사들이 눈물을 흘렸다"며 "소녀의 죽음에 대해 이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지 묻고 싶다"고 답답해했다.

이들 자매들을 가르쳐 온 열린교실 김정민(35) 관장은 정양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적했다.

김 관장은 30일 "고액과외를 받는 강남의 아이와 학원은커녕 학습지도 사볼 수 없는 가난한 아이들의 인생 승부는 이미 결정된 상태"라며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할 수 없고, 병이 들어도 치료받을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제도가 정양을 죽였고 어머니마저 죽일 것"이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터트렸다.

김 관장은 특히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해야 할 정치권이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한 게 무엇이냐"며 "선거를 앞두고 민생을 챙긴다며 쇼를 하고 있는 정치권은 정양의 죽음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정치권의 각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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