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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록도 항 근처 언덕에서 바라본 녹동. 배로 5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천형의 세월만큼 먼 곳이었다. ⓒ 이종호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 전문)

시인의 노래처럼 붉은 황톳길을 걷다 신발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하나 없어지던 전라도 길을 걸어 소록도에 들어간 사람들, 이들은 나병이란 병고(病苦)를 안고 살아온 비통(悲痛)의 세월이 수십 년 흐르는 동안 어릴 적 보리피리 불며 노닐던 고향을 꿈에서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 <소사모> 회원들과 소록도 사람들의 고향방문 기념사진 ⓒ 안정희

소록도 사람들은 고향에 찾아가 부모님의 묘소에 엎드려 통한의 사죄를 드리고 싶었지만 세상의 보이지 않는 장벽에 의해 수십 년 동안 고향을 찾아갈 수 없었다. 나병이란 천형(天刑)을 안고 살던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땅, 병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묘소를 죽기 전에 찾고 싶어했다.

여수문화방송이 소록도 사람들의 한 맺힌 고향 방문을 설 명절 특집으로 들려준다. 여수문화방송은 10일(일) 오전 11시10분부터 40분까지 30분 동안 '소록도 사람들의 두고온 고향(연출 안정희)'을 라디오를 통해 들려준다.

소록도 사람들이 '소록도를 사랑하는 모임(집행위원장 김덕모 호남대 교수)'의 도움으로 지난해 11월 중순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을 찾았다. 이들이 고향을 찾는 데 걸린 세월은 자그만치 50여 년, 부모님의 뼈는 진토가 되었지만 이들은 산하가 무너져라하고 '어머니'를 목메여 외쳐 불렀다.

▲ 57년만에 고향을 방문한 이점봉 할아버지가 조카며느리를 만나고 있다. ⓒ 안정희
소록도에서 생활하고 있는 원생 900여 명 중 절반 이상이 70세가 넘는 고령자들, 이들 대다수는 소록도에 들어온 후 단 한 차례도 고향을 가보지 못했다.

선착장도 버스정류장도 이들의 발걸음을 가로막지 않았지만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규정한 세상 사람들은 이들이 고향방문을 반기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찾아간 고향은 꿈에 그리던 고향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묘소를 찾아본 이들은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고 울먹였다. 그리고 고향 사람들이 "자식을 소록도에 보내고 가슴에 한이 맺혀 눈을 감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57년만에 고향인 전남 무안군 삼향면 맥포리를 찾아간 이점봉(83) 할아버지는 조카며느리를 만났다. 하지만 함께 고향을 방문한 2명의 동료들은 달라진 고향을 보고 왔을 뿐 일가 친척은 보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왔다.

▲ 여수mbc 안정희 씨.
'소록도 사람들의 두고 온 고향'을 연출한 안정희(39) 씨는 "남북이 화해하면서 이산가족도 왕래하는데 소록도 사람들은 세상의 보이지 않은 벽에 갇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고 안타까워했다.

고향방문을 동행 취재한 안 씨는 이들이 선착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경계와 냉대가 시작됐다면서 "우리 사회가 인권과 복지를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성숙한 사회로 가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소록도 사람들을 보살펴야 할 이웃으로 바라볼 때 진정한 복지국가가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안씨는 소록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물론 섬은 아름답다. 하지만 이 곳은 천형(天刑)이란 죄명을 쓰고 유배돼 살아온 소록도 사람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이 곳을 방문하거들랑 내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대할 수는 없지만 이웃 부모를 만난다는 심정으로 그들을 대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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