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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북측에서 운영하는 목란관에서 냉면을 시켰다. 주문 판이 따로 나왔다. 냉면만 달랑 먹기가 미안해 '모두부'(남측 두부와 비교하면 반모쯤 된다)를 시켰다. 너무 맛있어 하나 더 시켰다. 냉면 맛 역시 두부처럼 담백했다. 남측의 진한 육수 맛과는 사뭇 달랐다. 남측의 냉면처럼 얼음이 동동 떠 있지 않았지만 육수 그 자체로도 시원했다. 우리 집 식탁처럼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듯했다.

아내는 북측 여종업원의 이름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

"어, 정씨네요 저도 정간데…."
"선생님도 정씨 입네까, 반갑습니다."

우리는 50여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들처럼 북측 사람들만 보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북측 사람들과 하지 못했던 말을 실컷 하고 싶었다. 우리는 그동안 북측에 대해 너무나 오래 동안 입막음을 당하여 말의 변비증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북측 여종업원에게 "두부가 참 맛있네요" "냉면에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았죠" "참 곱게도 생기셨네요"' "고향이 어디세요"라는 등 그저 그런 말을 걸었다. 고상한 사람들이 듣기에 도무지 '쓰잘데기 없는' 말, 말 말 말을 했다.

우리가 북측 여종업원과 촌스러운 대화를 하는 동안 우리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그네들끼리 말을 했다. LA 관광에 다녀온 말을 하고 있었다. LA에서 어떤 음식인가는 너무 비싸 먹지 못했다고 말한다. 여행비용이 부족해서 사먹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 경제가 너무 어려워 살기 힘들다는 말, 말 말 말을 했다.

우리는 목란관에서 식사를 마치고 신계사를 거쳐 온정각으로 향하는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관광조장이 금강산 첫 산행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구룡연 올라가서 뭘 생각들 하셨어요?"

다들 피곤한지 묵묵부답이었다. 조장이 다시 묻자 아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통일요!"

아내는 역시 푼수였다. 다들 다 아는 빤한 정답을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씩씩하게 말했다.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관광 조장조차 반응이 없다. 공연히 버스 안의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버스 안을 썰렁하게 만들어 놓고 신계사에서 내렸다. 관광버스 안은 만원이었지만 신계사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 부부 단둘뿐이었다.

▲ 금강산 4대 사찰 중에 하나인 신계사는 한창 복원 불사 중이었다.
ⓒ 송성영
신계사는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사찰이다. 519년(법흥왕 6) 신라의 보운 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져 오는 신계사는 수많은 전각을 거느렸던 큰 절이었으나 6·25 민족전쟁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객승들이 묵을 선방이나 요사채도 없고 산신각도 종각도 없었다. 3층 석탑과 보리수나무, 주춧돌마저 없었더라면 신계사가 천년 고찰이었다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즈넉하거나 썰렁하니 휑한 터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옛 주춧돌을 그대로 이용한 만세루 복원 불사로 어수선했다. 그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말 새로 복원된 대웅보전에서는 나이 든 스님 한 분이 목탁 장단에 맞춰 염불을 외고 있었다. 안경을 쓴 젊은 스님 한 분은 이제 막 뼈대를 올린 만세루 주변을 오락가락하며 뭔가에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고 아주 젊은 처사는 여유만만하게 우리 부부를 반겼다. 모두가 남측 사람들이었다.

신계사는 사람도 건물도 모두 새로운 것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변함없는 것은 금강산뿐이었다. 하지만 그 변함없는 금강산마저 숨어 버렸다. 신계사 대웅보전 뒤편으로 관음연봉들이 첩첩이 이어져 있고 우측으로는 멀리 세존봉이 기가 막힐 정도로 수려하게 들어서 있다하는데 구름이 그 절경마저 열어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비뚤어져 있는 내 마음자리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 신계사 문필봉
ⓒ 송성영
그나마 대웅보전 왼편에 우뚝 솟아 있는 문필봉만이 그런 내 심정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문필봉은 선명했다. 붓 끝을 닮은 문필봉은 풍수학으로 따져 좋은 글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운을 준다고 하니 옛 시인묵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이곳 신계사를 향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을 운수납자들, 저 남도 끝자락부터 바랑 하나 달랑 걸쳐 메고 천리, 만 리 길 마다 않고 터벅터벅 걸어왔을 것이었다. 속세의 인연들을 훨훨 벗어던지고 신계사를 찾아왔을 그들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화두를 생각하다가 문득 대웅보전 앞에 서 있는 '합격기원'에 관한 문구를 보았다. 저 살벌한 철책을 넘어 이곳 금강산까지 '합격'에 관련한 불공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남측 사람들의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할 화두는 '통일'이기보다는 '합격'혹은 '일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산세가 구름에 뒤덮여 있어 별로 둘러 볼 것도 없는 신계사를 대충 둘러보고 나서 온정각으로 향하는 막차를 탔다. 온정각에 재집결한 관광객들은 온천욕을 즐기러 가거나 삼일포로 관광을 나섰다. 우리는 삼일포를 택했다.

삼일포로 향하는 길목에서 차창 밖으로 내 어릴 적 어린 누이동생처럼 곱게 생긴 여자 아이를 보았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긴 머리를 너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어림잡아 열두어 살쯤 돼 보이는 표정이 맑은 여자 아이였다.

가난해 보였지만 슬퍼 보이지 않았다. 가난 속에서 동생들을 챙겨야 하지만 고통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의 맑은 표정이 오히려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관광객들이 손을 흔들자 들꽃처럼 수줍게 웃었다. 부끄러운 듯 동생들의 손을 이끌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헌데 왠지 모르게 내 가슴 속에 그 아이의 수줍은 웃음이 아프게 박혀 왔다. 그 아이가 너무 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착한 아이를 보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그 아이가 가난해서 가슴이 아픈 것이 아니다. 착한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웃음이 그냥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나는 그 북측 여자 아이를 보면서 어렸을 때 착하디 착했던 내 어린 누이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어린 누이동생은 열한 살 무렵부터 보리쌀을 일었다. 7남매 가르치고 먹이랴 늘 바빴던 엄니의 일손을 덜어 주기 위해 가끔씩 동생들을 위해, 오빠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밥상을 차렸다. 하지만 어린 누이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위한다는 착한 마음으로 밥상을 차렸다. 힘들었지만 가난을 원망하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누이동생이 정작 가난의 고통을 알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 때문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가깝게 지내던 누이동생의 친구들이 누이가 식구들의 밥상을 차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불우이웃으로 추천해줬던 모양이다.

누이동생은 전혀 생각지 않은 설탕 한 포대를 받아들고 교장 선생님과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설탕 한 포대를 받아왔는데 며칠 후 학교 게시판에 교장선생님에게 설탕 한 포대를 받고 있는 사진이 자랑스럽게 내걸렸던 것이다. 그때부터 어린 누이는 가난의 고통을 알기 시작했고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고 한다.

내 어린 누이동생처럼 착하디 착하게 생긴 북측의 여자 아이 또한 엄마의 일손이 바쁠 때는 식구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밥상을 차릴지도 모른다. 힘들지만 가족들을 위한다는 착한 마음으로.

어쩌면 저 북측 아이에게도 남측에서 보내온 '설탕 한 포대'가 돌아갈지도 모른다. 가난을 확인시켜 주는 설탕 한 포대가 될지도 모른다. 설탕 한 포대가 아이의 웃음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기념사진을 찍어 게시판에 올려놨던 내 어린 누이동생의 교장선생님처럼 가슴이 아닌 머리로 돕고자 한다면 그 아이 역시 가난을 고통으로 받아 드릴지도 모른다.

좀더 가진 남측은 북측을 돕고 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돕고 있다. 도울 때는 사심 없이 도와야 한다. 그 사심 없는 마음들이 모이게 되면 철책선 조차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어린 누이동생을 닮은 북측 아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그 아이에게 달려가 말을 걸고 싶었다. 막상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냥 집은 어딘지, 장래 희망은 뭐고 또 취미는 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뭘 하고 노는지 그렇고 그런 말, 어떤 말이든 서로가 알아듣는 우리말, 말을 걸고 싶었다.


서로가 알아듣는 우리말

우리는 뭔가 말을 해야 한다
닫혔던 말문을 열어야 한다
갇혀있던 말을 해방 시켜야 한다
단절된 말을 이어야 한다
죽어있던 말을 살려 내야 한다
개새끼들이 시끄럽게 짖어댈수록
서로가 알아 듣는 참말을 해야 한다.
우리는 말말말 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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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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