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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아파트엔 매주 목요일마다 ‘목요장’이 열립니다.

장이 열리는 아침이면 도매시장에서 들여오는 야채나 생선들을 신선한때 구입하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들곤 합니다. 특이한 것은 요즘 들어 점점 더 젊은 주부들은 줄어들고, 노인 분들이 많이 나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운동이니 문화교실이니 여가를 즐기기 위해 집을 비웠던 젊은 층들이 요즘엔 시간제 일이라도 해보겠다고 부업전선에 나서기 때문에, 점차 집안일을 봐주는 부모님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할머니들의 살림지혜는 결혼 20년차를 바라보는 저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직접 농사를 지어보시기도 하고 수 십년간 당신 손으로 음식을 만들며 체득한 독특한 기준이 생기신 때문입니다.

이리저리 배추를 고르는 저에게 벌써 배추를 골라 놓으신 할머니가 한마디 하십니다.

"배추는 채(길이)가 짧고 통통한 게 좋은 거여. 갓(두께)은 얇아야하고 시퍼런 겉잎이 너무 많지 않아야제. 요즘엔 왜배추랑 개량종이 많지만 배추는 조선배추(토종)가 최고여. 보기엔 부실하고 못생겼어도 뜯어 먹어보면 고소하고 달달한 기 그런 김치 한 가지면 다른 반찬이 필요없어. 그런데 하나같이 어째 크기만 하고 시퍼런 게 비싸긴 X싸게 비싸네."

"할머니도 김치 하시게요?"
"추석이 얼마 안남었자너. 그래도 어쩌것어. 아들이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겠다는디. 두어 통 사서 추석 전까지 먹을 막김치나 해 볼라는데 무신 배추 값이 이리도 비싼지…."

실제로 배추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습니다. 두 달 전에 두 통들이 한 자루에 4천원 정도 하던 것이 이제는 좀 낫다 싶은 물건은 한 통에도 5천원이 넘어갑니다. 배추 두 통에 만원, 무 한 개 3500원, 쪽파 한 단 1500원, 미나리와 생강 등등. 막상 먹으려면 얼마 되지 않는 양의 김치를 담기위해 2만원 정도를 들여야 합니다.

실제로 배추 두 통을 가지고 김치를 담그면 3kg~5kg정도가 나가게 되는데, 요즘 홈쇼핑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김치 값은 10kg당 3만5000원정도로 집에서 담가먹는 것의 절반 값밖에 안하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은 배추를 고르며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기(이것이) 아무래도 약 쳐서 기른 거 아이가. 배추금(값)이 비싸니까 속성재배를 해가지구, 크기만 크지 속이 비었다 아이가. 이런 배추는 김치담가도 맛도 없다."

할머니는 치마를 들치고 고쟁이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배추 값을 치르시면 서도 물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눈치였습니다.

"아줌마도 배추사시려구요? 추석 밑이라 배추 값이 부르는 게 값이에요. 다음 주 올 땐 아마도 더 오를 텐데. 지금 들여다가 아예 추석김치를 담으세요."
"그런데 배추가 영 맘에 안 들어서요."
"글쎄 산지에서 배추가 올라오지 않으니까요. 저도 물건이 맘에 안들이고 너무 비싸서 안 가져오려고 해도 찾으시는 분들이 있어서 안 가져올 수도 없구. 추석까지 먹을 거만 하세요. 추석 지나면 물건도 좋아지고 값도 떨어질 거예요."

저 역시 결정을 못하고 배추만 주물럭거리고 있는데 반찬거리를 사러 나왔던 젊은 애기엄마가 한마디 합니다.

"김치 사 드세요. 저도 사 먹는데 값도 싸고요. 맛도 그냥 먹을 만하던데요. 집에서 담가 먹는 것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값싸고 수고도 덜고 이렇게 비쌀 땐 사먹는 게 오히려 싸게 먹혀요."

결국 저는 주무르던 배추단을 내려놓고 간절이 고등어 한 손만 사가지고 집에 돌아와 홈쇼핑에 전화를 걸어 김치를 주문했답니다. 결혼 19년 만에 처음 김치를 사 먹어보는 심정은 묘했습니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가족들에게 변명을 합니다.

"저기 워낙 배추 값이 비싸서요. 이번 한 번만 이거 먹고 추석엔 새김치 할 거니까…. 배추도 워낙 좋지 않고 무값도 비싸고. 입맛에 맞지 않아도 이번만…."

그말 끝에 여태껏 아무 말도 없이 잘 먹던 남편과 아이들이 한마디씩 합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맛이 이상하더라니."
"맞아. 색도 붉그딕딕하고 뭐가 하나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공장에서 만든 김치엔 조미료도 많이 들어가고 양념도 좋은 걸로 안 쓴다던데…."

언제부터 김치에 전문가들이 되었는지 갑자기 식탁 위가 성토장이 되는 분위기에서 어머니가 따끔하게 한마디 하십니다.

"맛만 좋다. 배추 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아나? 예전엔 배추 값 비싸면 양배추로도 담가먹고 다꽝(단무지)김치도 해먹었구마. 세상 좋아져서 싸게 먹으면 됐지 무신 말이 많노. 배추 값 내리면 담가 먹자. 이자 고만들 하고 밥 묵그래이."

하기야 맛으로 보나 정성으로보나 사먹는 김치가 집에서 담근 것만 하겠습니까. 어쨌든 천정부지로 오르는 야챗값 덕분에 생전처음 내손 안대고 남이 만들어준 김치를 다 먹어보게 되었답니다.

세상은 참 좋아져서 주부들이 집에서 긴 시간 애쓰지 않아도 손쉽게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값도 싸고 종류도 다양하게 나온 김치들이 그동안 김치 담그기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야했던 주부들의 시간과 노력을 덜어준 셈이지요.

그러나 저는 앞으로도 계속 김치를 담가 먹게 될 것 같습니다. 식구들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다른 집에서는 맛볼 수 없는 저만의 독특한 김치맛과 담그는 재미를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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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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