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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거실에서 차를 마신 후, 권 선생은 겉옷조차 벗고서 대장정의 드라마를 시작했다. 그는 그동안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강물이 흘러가듯, 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얘기는 듣는 사람이 열중할 때 더욱 신이 나게 마련이다.

직장까지 그만두다

안두희는 키가 6척이나 되는 건장한 체구요, 젊은 날 검도와 권투를 해서 주먹도 한 방 있고 사격술 또한 뛰어났다. 그런 그를 제압하기 위해서 나도 체력단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두희를 내 손으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날부터 날마다 기초 체력을 단련하고 합기도를 익혔다. 그래도 부족할 듯해 봉술과 검도를 연마했다. 그러면서 서울 장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안두희를 찾아 나섰다.

▲ 안두희 추적 10년의 대장정을 토로하는 권중희 씨
ⓒ 박도
넓디 넓은 서울, 그것도 숨어사는 안두희를 찾기란 솔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처럼 어려웠다. 안씨는 주민등록에 세대주를 그의 부인인 박아무개, 또는 그의 막내아들 안아무개로 올려놓기도 했고, 때로는 주소와 거주지도 달랐다.

안두희를 찾기위해 1년여 헤맨 끝에 마침내 잠실 주공 아파트 단지에서 안두희가 트레이닝복을 입고 아침 운동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즈음에는 안씨는 간덩이가 부었는지 동회 주민등록부에다 처음으로 자신을 세대주로 기재하고 있었다. 막상 안씨를 보자 그동안 골탕 먹은 짜증스러운 감정이 일순 사라지고,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애인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기뻤다.

하지만 나 혼자서 그를 붙잡아 자백을 받아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 같아서 같이 일할 동지를 찾아 나섰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안두희를 납치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일에 도움을 청하면, 모두가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선뜻 동참해 오는 이가 없었다.

사실 안두희에게 접근하여 각목으로 두들겨 실신시키는 일은 나 혼자라도 할 수 있지만, 기골이 장대한 그를 위협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일만은 나 혼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기 전에 안씨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게 그때나 이제나 나의 지론이었다.

나와 함께 안두희를 응징할 믿을 수 있는 동지를 구한다고 차일피일하는 새, 안씨는 김포군 신곡리로 이사를 갔을 뿐 아니라, 그새 새 부인까지 얻어 살고 있었다.

마침 손성표(당시 23세), 정용호(27세), 임지은(25세)씨 등 동지가 생겨서 실행하려고 했으나 그 무렵 안두희는 처조카 백아무개를 경호원처럼 데리고 있었고, 집안에는 무척 사나운 개가 있어서 쉽사리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한밤중에 동지들과 안두희를 납치하는 거사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개가 몹시 짖어대서 번번이 때를 놓쳤다.

나는 이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기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고 장기전으로 대처했다. 먼저 안두희가 거처하는 동네에다가 셋방을 얻어 빚쟁이를 피해 서울에서 도망 왔다고 헛 소문을 내어 안과 접촉을 시도했다. 내 작전이 맞아떨어져 곧 안두희와 바둑까지 두는 다정한(?) 이웃 사이로 발전했다.

1차 응징의 날

어느 하루 안과 같이 바둑을 두는데, 안씨가 “내일은 서울에 좀 다녀와야겠다”고 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심심해서 어떡하나”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이튿날(1987년 3월 27일) 12시 무렵, 안씨가 외출 차비를 하고 나섰다. 나는 20∼30미터 뒤에서 안씨를 뒤따랐다. 버스 정류장 못 미친 곳에서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안씨의 옆을 지나면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말을 건넸다.

“아니, 이제야 나가십니까?”
“어! 웬일이야. 오늘 안 나간다더니.”
“바둑 둘 상대도 없고 따분할 것 같아서 저도 오늘 집에 잠깐 들러 옷이나 갈아입고자 나갑니다.”
“그래? 잘 됐어. 그럼 같이 가자고.”

그토록 벼르고 벼르던 안두희와 함께 같은 버스를 타다니. 애당초 계획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혼자라도 응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안씨가 마포구청 앞에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나도 집이 그 근처라고 둘러대고 내렸다. 나는 우선 다방 같은 데서라도 암살 배후를 자백 받고 응징해야겠다는 속셈으로 차 한 잔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안씨는 출발 직전에 집에서 마셨다면서 응하지 않았다. 나는 조급해졌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나는 왼손으로 안의 오른쪽 어깨를 잡고 본론을 꺼냈다.

“꼭 차만 들자는 게 아니라 김구 선생 암살에 대해 할 말도 있고.”

내 말도 끝나기 전에 안씨는 “응”하면서 펄쩍 뛰었다. 그는 주머니속의 손을 빼면서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으로 나에게 덤빌 듯한 자세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품속의 각목을 꺼내 안의 이마 부위를 내리쳤다. 안두희는 “아악”하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 놈이 바로 38년 전 김구 선생에게 총을 쏜 반역자 안두희다! 이 놈을 찾기 위해 나는 5년을 헤맨 사람이다. 이 놈을 두들겨 팰 테니 모두 비켜라!”

언저리 사람이 놀라 비켰다. 안은 피를 흘리면서도 내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는 듯 허우적거렸다. 나는 백범 선생 머리와 가슴에 총부리를 겨냥한 그 손부터 부러뜨릴 생각으로 각목으로 내리쳤다.

단식 투쟁으로 백범 암살 배후 규명 촉구하다

한참을 각목으로 두들겨 팬 후, 이만하면 목숨은 붙어있을지라도 병신은 되리라는 자신감으로 미리 준비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반역자를 응징하면서'라는 성명서를 남겨 두고 택시를 타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내 생각은 순진하게도 그만하면 안씨가 혼쭐이 나서 제 스스로 모든 진상을 털어놓으리라 생각했다.

얼마 후 집으로 경찰이 와서 마포서로 연행됐다. 곧 안두희가 입원한 병원에 들러 취재를 마친 기자들이 유치장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기자들에게 안의 피해 정도부터 물어봤다. 그랬더니 전치 3주 정도의 부상이라고 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다시 물어도 3주가 분명하고 했다. 나중에 증거물로 압수된 각목을 보니 내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각목 끝이 보도블록에 부딪쳐 반쯤 쪼개져 있었다. 안씨로서는 천운이겠지만 나는 그를 병신으로 만들지 못한 게 몹시 분했다.

수감 후 여러 변호사와 여론, 그리고 애국단체의 석방 요구로 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경찰에 연행된 지 35일 만인 1987년 5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났다.

▲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왜 저같은 필부가 안두희를 응징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요. 오죽하면 무지랭이인 제가 나섰겠습니까? (백범 묘소 앞에서 응징의 당위성을 말하는 권중희 씨)
ⓒ 박도
출감 후, 나는 안두희가 그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여 김포 신곡리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안은 몸을 숨겼다.

마포구청 앞 응징사건이 일어나자 신문들은 연일 사건보도와 사설, 해설 등을 통해 백범 암살 배후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당시 민추협 기관지 <민주전선>에도 나의 성명서를 전재하면서 “백범 암살 진상을 항구적이고 입체적으로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런 후속 조치도 없이 곧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나는 냄비 근성의 언론과 그제나 이제나 입만 뻥긋하면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고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사기치면서,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눈이 어두운 정치인들을 더 믿을 수도 없어 이번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는 안두희에게 나를 자연스럽게 접근시켜준 성낙순씨의 양아들 노송구씨였다.

노송구씨는 자기가 안두희를 2차 응징할 테니 안이 있는 곳과 응징에 필요한 지식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단식으로 심신이 지친 나에게 백만원군으로 용기를 주었다. 나는 그와 함께 제2차 응징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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