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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 국내선 도착장은 왁자지껄한 고등학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서울과 대구, 부산, 광주, 군산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아이들이다. 학교마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10월 중순은 수학여행의 대목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청한 가을 날씨도 한몫한다.

넓은 주차장은 줄지어 선 대형 버스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버스 사이의 통로가 길 구실을 한다. 비켜서라는 버스의 경적과 인솔 교사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가을 햇살을 찢을 듯 요란하다. 언제 오든 시끌벅적함이 제주의 첫인상이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

여전히 제주도는 고등학교에서 가장 선호하는 수학여행지다. 해마다 수학여행 관련 선호도 조사를 실시하지만, 최근 주춤해졌다고는 하나 너끈히 과반의 지지를 받는 곳이다. 제주도가 지닌 특유의 이국적인 이미지 덕이다. 제주도는 '해외'라며 너스레를 떠는 아이들도 있다.

첫 코스는, 당연히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미래세대로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수학여행을 시작하는 건 나름 뜻깊은 일일 터다.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호명하는 것도 민간인 학살로 점철된 제주도의 핏빛 현대사를 잊지 말자는 취지다.

아뿔싸,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제주 4.3 평화공원이 첫째 주와 셋째 주 월요일이 정기 휴무일이라는 점을 깜빡했다. 기실 공공 도서관과 박물관, 미술관 등이 대개 월요일 문을 닫는다는 건 상식에 가깝다. 출발 전에 알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념관을 둘러본 뒤 울컥한 마음으로 만나게 되는 '백비'의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 진상규명이 되고 희생자와 유가족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 비로소 이름을 새겨 일으켜 세울 거라는 의미를 들려주려 했다. 누구든 그 앞에 서면 '소리 없는 울부짖음'이라는 형용모순을 수긍하게 된다.

주차장에서 기념관 가는 길, '비설'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조형물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려 했다. 당시 갓난 어린아이를 품은 채 토벌대의 총에 맞아 숨진 스물다섯 살 어머니의 실화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는 교과서 속 제주 4.3을 다룬 단원의 삽화로 수록되어 있다.

또, 끝이 보이지 않는 희생자들의 묘비와 마을 이름과 함께 새겨놓은 희생자들 이름의 행렬도 꼭 보여주고 싶었다. 몇 날 며칠을 읽어도 다 읽어낼 수 없는 그 많은 위패 앞에 선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제주 4.3 평화공원의 묘비 위엔 늘 까마귀 떼가 꺼이꺼이 울었다.

서둘러 다른 답사지를 수소문해야 했다. 실상 제주도 전역이 4.3 유적지이고 웬만한 마을마다 위령비가 세워져 있지만, 100명이 넘는 아이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사견이지만, 적어도 제주 4.3을 주제로 한 답사는 한 학급 규모를 넘어서면 곤란하다.

삭막한 아이들의 가슴을 덥히려면, 사실로서의 역사로만 접근해선 효과가 떨어진다. 실화에 기반 한 이야기를 덧입혀야 아이들의 귀를 쫑긋 세울 수 있다. 그러자면, 제주 4.3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제격이다.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가 쓴 <순이 삼촌>을 먼저 떠올린 이유다.

둘로 나눠 절반은 조천읍 북촌리에 있는 너븐숭이 4.3 유적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제주 시내를 관통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40분쯤 가면 나온다. 토벌대에 의해 주민 전체가 한날한시에 몰살당해 제삿날이 같다는 마을로, 4.3 유적지 중 비교적 널리 알려진 곳이다.

소설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너븐숭이에는 소담한 기념관 옆으로 10여 기의 아기 무덤과 학살당한 시신이 널브러져 있던 옴팡밭이 나란하다. 기념관 입구 강요배 화백의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 그림은 차마 목이 메어 쳐다보기 힘들다. 집단 학살이 자행된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은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터진목 4.3 유적지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의 모습
터진목 4.3 유적지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의 모습 ⓒ 서부원

나머지 절반은 성산 일출봉 아래 터진목 유적지를 향했다. 하고 많은 곳 중에 터진목이 불현듯 떠오른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순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학살당한 시신이 파도에 쓸려가는 주인공의 꿈 장면 말이다.

마을이나 들판, 하다못해 동굴에 갇힌 채 학살당했다면 이후 유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을 텐데, 백사장이나 폭포 등 바닷가에서 처형된 경우엔 유실이 불가피했다. 제주도 곳곳에 '헛묘'를 조성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봉분만 있는 묘에 제사를 지내는 유가족의 한은 감히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소설의 첫 장면은 한강 작가가 언젠가 찾아온 이곳 터진목 학살터에서 모티프를 얻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예나 지금이나 터진목에는 웬만한 집채도 집어삼킬 만한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오랜 세월 성산 일출봉의 산채를 수직 절벽으로 깎아낸 위용은 여전하다.

터진목은 성산 일출봉과 한라산이 자리한 제주도 본섬을 잇는 사주(沙柱) 지형으로 '터진 길목'이라는 뜻이다. 4.3 당시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않고 끌려와 공공연히 총살되었던 현장이다. 극악무도했던 서북청년단의 주둔지와 인접한 곳이어서 집단 학살이 빈번했다.

사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왔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뿐 읽어봤다는 아이는 없었다. 하긴 4.3에 대한 역사 지식과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읽기가 여간 만만찮은 작품이라 큰 기대는 없었다. 조만간 꼭 읽어보겠다는 다짐만으로도 기특했다.

간혹 올레길을 걷는 이들만 눈에 띌 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없었다. 주변은 잔뜩 찌푸린 하늘과 거칠 것 없이 불어오는 칼바람 소리에 스산한 풍경이었다. 좁쌀 굵기로 성기게 갈린 거뭇한 현무암 모래가 파도에 쓸려가는 소리까지 더해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성산 일출봉 방향의 도로변에는 운전자들을 향해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듯 동백꽃을 그린 타일 벽을 조성해 놓았고, 조촐한 기념물을 세우는 공사도 한창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올레길을 걸었다. 이곳은 올레길 1코스의 일부로, 총 22개의 올레길 중 가장 인기가 있는 구간이다.

 터진목 4.3 유적지 들목 도로변에는 동백꽃을 새겨넣은 타일 벽이 조성되어 있다.
터진목 4.3 유적지 들목 도로변에는 동백꽃을 새겨넣은 타일 벽이 조성되어 있다. ⓒ 서부원

두툼한 책을 펴놓은 듯한 4.3 유적지 표지석 앞에 멈춰 섰다. 그 앞 바다를 향해 내뻗은 모래밭이 당시 수백 명의 민간인을 세워두고 총살한 현장이다. 작가가 책 제목을 왜 <작별하지 않는다>로 지었는지 느끼게 된다. '육체'는 떠나보냈어도 '영혼'과는 쉬이 작별할 수 없다는 그 느낌을 알 것만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성산 일출봉을 먼발치에서 올려다보며 한 아이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되뇌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는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문제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귀포의 남원읍에 자리한 숙소로 돌아오는 길, 휴게소 삼아 표선 해수욕장에 들렀다. 땡볕이 걷힌 가을날 오후 백사장을 걷는 것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백사장의 차분한 빛깔도, 비릿함이 사라진 바다 내음도,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촉감도, 여름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표선 해수욕장 근처의 표선 한모살 유적지. 뒤로 보이는 건물은 표선 도서관이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국화꽃다발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표선 해수욕장 근처의 표선 한모살 유적지. 뒤로 보이는 건물은 표선 도서관이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국화꽃다발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 서부원

가만 보니, 해수욕장 주차장 들목인 표선 도서관 로터리도 4.3 유적지였다. 잡풀 무성한 둥그런 공터 앞에 '표선 한모살'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토벌대의 말을 믿고 하산한 주민들을 한데 모아 학살한 곳이다. 표지판 앞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국화꽃다발에 눈물 같은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주43#작별하지않는다#제주43평화공원#너븐숭이#터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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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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