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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고금항일운동기념사업회는 고금테마공원 일원에서 '제7회 고금항일운동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제'를 거행했다. 하성일 광주지방보훈청장, 김현철 부군수, 유족과 주민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항일운동 추모제'는 한화와 분향, 만세삼창, 광복절 노래 제창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선열을 추모하고 '항일운동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행사였다.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를 잊지 않고 지역 주민들의 중심이 되어 행사를 진행하고 숭고한 항일의식을 기억 계승하는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그렇다면 고금도의 항일운동은 어떠했는가. 일제강점기에 고금도에서 일어났던 '독립 만세운동, 용지포 간척지 사건' 등 민족 주권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알아야 한다.

1920년 1월 고금보통학교 정학균(17)과 이현열(20)이 만나 서로 의기투합해 고종 서거 1주기인 1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정학균과 이현열은 지인들과 접촉해 마을별로 책임자를 선정했다.

거사 전날인 21일 이현열은 이기홍, 홍철수, 김천영, 이수열, 이기홍, 이동운, 이정재 등의 도움을 받아 태극기를 만들었다.

22일 거사일 아침 경찰은 비상경계를 폈다. 경찰주재소 순사부장과 순사 2명 그리고 소방대원 등이 보통학교 앞길에서 행인들을 검문했다.

이현열은 마을 대표들에게 마을별로 10여 명씩 동원하고 21일 밤에 마을 대표에게 태극기를 전달했으며, 22일 아침 현장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22일 오전 11시께 고금보통학교 뒤편 덕암산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됐다. 정학균의 지시를 받은 학생들 일부가 덕암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 앞에 갑자기 300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군중이 모이자 정학균과 이현열은 차례로 나와서 연설했으며, 그들의 선창에 따라 군중들은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경찰은 고금면 주재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들의 검거에 나섰다. 당시 연행된 이들은 주모자였던 정학균, 이현열, 홍철수, 김천영, 이수열, 배명순 등이 검거되었는데, 80여 명에 이르렀다.

1920년 2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정학균은 징역 4개월, 이현열은 징역 3개월 10일, 홍철수, 이수열, 김천영, 배명순 등은 태형 90대를 각각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5월 3일 이현열은 징역 2개월 18일, 정학균은 2개월 17일로 감형돼 출옥했다.

또한 고금도에서 전개했던 '용지포 간척지 투쟁'사건을 알아야 한다.

용지포구(가교리)를 막아 얻을 수 있는 농지는 약 200정보의 방대한 갯벌이다. 고금도 주민들은 이를 간척하려고 오래전부터 많은 노력을 하여 90% 정도는 이미 막아놓았다. 그러나 나머지 20여 미터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빨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방치돼 있었다.

1900년 고금도에 유배되었던 이해원(대한제국 무관 출신)은 용지포를 막으면 큰 농토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1910년 총독부로부터 용지포 공유수면 매립 허가받아 일본인 스즈키에게 팔아넘겼다. 그러나 스즈키는 자금이 부족하여 준공을 보지 못하여 1928년에 자동으로 허가가 취소됐다.

이때 고금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매립하기 위하여 주주 6명을 선임하고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러자 스즈키 측에서도 재허가를 신청해 총독부에 접수한 상황이었다.

결국 1930년 10월 스즈키에게 재허가가 떨어졌다. 그러자 고금도 주민들은 분개했다. 그리고 '고금 8천 도민 용지포 이권옹호동맹'을 결성하고 대항하였다. 이기홍 대장을 중심으로 7~8명이 나서서 스즈키 측에서 동원한 인부들이 일을 할 수 없도록 방해했는데 이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 500여 명은 현장으로 나와서 스즈키의 허가권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다음날 전남도경에서 무장 경관 10여 명과 완도경찰서 순사 10여 명이 무등환 경비선을 타고 고금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주민 30여 명을 체포하려 했는데 색출 과정에서 면민들은 너도나도 모두 자신이 폭도라고 주장하여 일제 탄압을 피했다.

결국 완도경찰서 책임자가 도민들과 타협해 면민 대표 청년 4명과 장년 4명, 노년 4명만 선정하여 완도경찰서에 유치됐다. 다음날 완도경찰서 회의실에서 도경 경부, 완도경찰서장, 완도군수, 도 평의원 등이 모여 고금 대표와 지주 측 대표 사이에 끈질긴 협상 끝에 고금도 주민들의 요구가 관철됐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지상에 보도가 금지됐으며, 고금면의 면민이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본인 지주와 경찰과 맞서 투쟁하여 일부 승리를 거둔 항일투쟁의 본보기였다.

매년 지역에서 고금도의 항일투쟁을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추모제를 거행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다만 추모제에 자라나는 지역의 학생들이 함께해 지역의 항일정신과 민족정기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남철씨는 전남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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