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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이하, 해방일지)와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의 1963년 영화 <부베의 연인>(이하, Bube)은 혁명 이후의 혼란과 유산, 이에 따른 개인의 고통을 중심에 둔 작품이다. 역사적 사건 속에서 살아남은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사회적 평가를 탐색하고 있다. 작품은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맥락을 같이한다. 이상을 위해 싸웠던 인물들의 희생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들의 삶과 투쟁은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이며, 남겨진 이들은 이념과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해방일지>는 전후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아버지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딸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버지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빨치산으로 싸웠고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그렇지만, 그의 이념은 사회적 주류에서 배척당했고 가족조차 그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딸은 아버지를 우스꽝스러운 이상주의자로 생각하며,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Bebo's Girl Claudia Cardinale(Mara) and George Chakiris(Bebo)
Bebo's GirlClaudia Cardinale(Mara) and George Chakiris(Bebo) ⓒ www.imdb.com

영화 <Bube>는 파르티잔인 부베와 그의 연인 마라(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와의 관계가 중심 서사이다. 이탈리아의 전후 사회적 혼란과 개인의 도덕적 갈등을 포착하고 있다. 그는 전쟁에서 영웅적 역할을 했지만, 평화 시기에는 사회적 규범에 내몰리며 범죄자로 실형을 받는다. 마라는 부베의 이념과 사랑을 간직하며, 자기 삶을 찾아가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한다.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의 내적 성장은 가족과 연인이라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해방일지>에서 딸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단순히 이상에 미쳐 있던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에피소드와 일기,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단순한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시대를 통찰하며 살아온 깊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를 깨달으면서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내적 성찰을 하게 되고, 그를 단순히 이념의 희생자로만 보았던 자신의 시각을 반성한다. 이 과정은 그녀가 아버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전환점이 된다.

마라는 부베의 투옥 후 상실을 겪으면서도 한 달에 두 번씩 면회를 다니며 그를 기다리라 다짐한다. 그녀는 주위의 유혹과 사회적 압박을 극복하고, 부베에 대한 사랑과 신념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마라는 자기 삶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부베와의 관계에서 내적 성숙을 이루어낸다.

성장 서사는 현대 사회에서도 유의미하다. 여성들이 더 이상 가족이나 연인에게 종속되지 않고, 사회적·정치적 갈등 속에서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주제다. 딸과 마라는 모두 자기 삶 속에서 아버지나 연인의 이념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사회와 충돌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원작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2022, 창비>
원작 소설<아버지의 해방일지>(2022, 창비> ⓒ 황융하

사회적 규범에서 처벌과 개인의 고통

작품들이 공통으로 다루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이념적 투쟁을 벌였던 인물들이 전후 사회에서 겪는 처벌과 고통이다.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배척당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심지어 초면인 사람들의 어려움까지도 외면하지 않는다. 반면 그의 동생인 작은아버지는 형을 냉담하게 바라본다. 연인의 부베는 전쟁 후, 평화로운 시대의 법과 도덕 앞에서는 다른 심판을 받으며 고통을 겪는 처지에 놓인다. 이렇듯 두 주인공은 이념과 현실 사이의 틈 속에서 고뇌하고, 그들이 감내하는 시대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소설과 영화는 이념과 현실, 혁명과 일상의 갈등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두 작품은 역사적 사건의 유산이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지며, 그 속에서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가를 다룬다. 아버지와 부베, 이들의 딸과 연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유산을 마주한다.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의 문체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회상 형식으로 이루어지며, 내면의 독백과 감정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독자가 딸의 심리적 여정을 함께하도록 이끈다. 아버지의 일기 속 문장과 딸의 현대적 해석이 대비되며, 간결하고 절제된 문장 속에 깊은 감정과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대화체보다는 서술 위주의 문장이 많으며, 내적 독백과 과거 회상에 큰 비중이 있다.

영화의 OST 'La Ragazza di Bube'는 영화의 서정적 분위기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주며, 칸초네 특유의 애잔함과 시대적 비애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하다. 이탈리아의 전통과 정서를 담은 음악이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은 국경을 넘어 한국의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어.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부베의연인#아버지의해방일지#파르티잔#주체적여성#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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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의 질서를 의문하며, 딜레탕트Dilettante로 시대를 산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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