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사 수정 : 9일 낮 12시 59분]

 이상현 작가의 캘리그래피 작품
이상현 작가의 캘리그래피 작품 ⓒ 이상현

한글은 보기에 아름답다.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한글은 읽지 못하고 뜻을 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문자다.

이런 한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려 애쓰는 이가 있다. 서예가이자 캘리그래피 작가인 이상현이다. 한글날을 앞두고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바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외국인들 앞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는 이상현 작가.
외국인들 앞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는 이상현 작가. ⓒ 이상현

캘리그래피는 글씨에 감성의 옷을 입히는 작업

"캘리그래피는 글씨에 감성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에요. 즐거움은 즐겁게 표현할 수 있고 그리움은 그립게 표현할 수 있는 감성. 한글은 그런 감성을 입히기에 더없이 좋은 문자죠."

그는 우리나라 1세대 캘리그래피 작가로 꼽힌다. 어릴 때부터 서예를 배우고, 우리나라 첫 서예학과인 원광대학교 서예학과를 나왔지만, 그가 맞닥뜨린 세상은 서예를 그저 낡은 것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세상에 맞서 글씨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또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으며 그는 캘리그래피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가 알아주는 서예가이자 캘리그래피 작가로 우뚝 섰다.

 영화 <타짜>(2006) 포스터
영화 <타짜>(2006) 포스터 ⓒ 싸이더스

2006년 개봉한 영화 <타짜>의 포스터에 새겨진 강렬한 두 글자 '타짜'를 그가 썼다. 그는 이 두 글자를 쓰려고 통장을 털어 불법 도박장을 찾았다고 한다. 이내 돈을 날린 그는 한참을 구석에 앉아 타짜들의 표정과 손놀림을 지켜보다 작업실로 달려갔다. 그가 손에 쥔 건 붓이 아니라 칡뿌리를 두드려 편 뿌리 붓이었다. 거친 뿌리 붓 끝에 먹을 묻힌 그는 마치 화투패를 내려치듯 종이에 붓을 내리쳤다. 그렇게 '타짜' 두 글자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2012년 방영한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포스터. 이상현 작가가 로고 타이틀을 썼다.
2012년 방영한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포스터. 이상현 작가가 로고 타이틀을 썼다. ⓒ MBC

 2015년 한글날을 맞아 구글의 의뢰로 이상현 작가가 제작한 구글 한글 로고.
2015년 한글날을 맞아 구글의 의뢰로 이상현 작가가 제작한 구글 한글 로고. ⓒ 구글

 최근 이상현 작가가 작업한 '일품진로'.
최근 이상현 작가가 작업한 '일품진로'. ⓒ 하이트진로

그 뒤로도 그는 20년 넘게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광고, 그리고 기업 및 제품의 캘리그래피 작업을 해왔다. 2015년에는 한글날을 맞아 'Google(구글)'의 한글 로고 작업을 했고, 뉴욕 타임스퀘어에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아리랑' 세 글자를 쓰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상현 작가의 대형 캘리그래피 작품.
이상현 작가의 대형 캘리그래피 작품. ⓒ 이상현

그는 어떻게 서예를 쓰게 됐을까. 처음 붓을 잡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지나치게 산만했던 아들을 진정시키려고 어머니가 서예학원에 데려다 놓았다고 한다. 먹향도, 고요함도 싫었던 그는 첫날부터 하얀 벽에 시커먼 먹을 묻히며 낙서를 했는데, 이를 본 선생님이 '너 참 잘 한다'고 칭찬했다. 이상현 작가가 평생을 모신 첫 스승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1년, 그는 우연히 우리나라 어느 대학에선가 서예를 가르친다는 이야길 듣고는 그길로 무작정 교육청에 찾아가 그 대학이 익산에 있는 원광대학교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원광대엔 198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문을 연 서예학과가 있었다.

 지난 5월 익산을 찾은 이상현 작가.
지난 5월 익산을 찾은 이상현 작가. ⓒ 윤찬영

그는 "원광대 서예과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우물 위 좁은 하늘만 상상하며 살았을지 모른다"고 했다.

"원광대는 당시 서예문화의 핵심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다 몰려왔어요. 다들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각자의 스승이 세계 최고라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글을 쓰는 스타일은 저마다 다 달랐어요. 붓을 잡는 방법부터, 붓을 움직이는 방법, 하다못해 화선지와 재료도 다 제각각 다른 것을 고수했어요. 교수님도 내 은사님과 다르게 가르치시니, 길을 잃은 적도 있었죠. 하지만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넓은 시야로 세상을 유연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서예는 낡았다는 세상의 인식에 맞서다

대학을 졸업한 그의 앞에 놓인 건 변화를 꺼리는 서예계와 대중의 무관심이었다. 그는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변화를 꾀했지만 전통 서예만을 고집하던 이들은 그런 그를 '이단아'로 몰았다. 그의 스승인 유천 이동익 선생조차 주변에서 전하는 이야기만 듣고 그에게 등을 돌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변화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굳게 믿었다.

"모든 것은 생성과 변화, 발전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역사가 되죠. 세계를 감동시키고 있는 사물놀이 또한 풍물놀이에서 가락을 따와 새롭게 변화하고 발전시킨 것 아닌가요. 다만 그 변화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며 아름답게 발전할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어가야 하는 게 오늘날 작가의 시대적 사명이자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늘 싸우고, 변화를 이야기해요."

 '꽃'이라는 글자로 꽃길을 만들었다. 가로 1m짜리 작업으로 프랑스에서도 전시돼 호평을 받았다.
'꽃'이라는 글자로 꽃길을 만들었다. 가로 1m짜리 작업으로 프랑스에서도 전시돼 호평을 받았다. ⓒ 이상현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KBS 인기 프로그램 <한국, 한국인>에서 나와달라고 한 것. 진행을 맡은 김동건 아나운서는 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해보라고 했고, 그는 오랫동안 품어온 생각을 거침없이 꺼내놓았다.

방송이 나간 뒤 그를 질타했던 스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스승은 "수고했데이" 한 마디를 건넸다고 한다.

 외국인들에게 캘리그래피를 가르치고 있는 이상현 작가
외국인들에게 캘리그래피를 가르치고 있는 이상현 작가 ⓒ 이상현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서예는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았다. 처음엔 그에게 일을 주는 이도 많지 않았다. 그는 더 많은 이들이 서예를 쉽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을 접목해 보기로 하고, 전화번호부를 뒤져가며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디자인 기획사와 기업들을 무턱대고 찾아다녔다.

그러던 2000년 봄, 어느 식품 대기업을 찾아가서 우여곡절 끝에 마음씨 좋은 이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선심 쓰듯 기회를 줬다. 회사가 개발 중인 '춘면'의 로고 타이틀을 써보라고 한 것.

그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의 로고 타이틀은 우리보다 한참 위였다. 온종일 발품을 팔면서 광고판을 찍고 전봇대에 붙은 전단지를 모은 그는 비닐 포장지, 찢어진 잡지와 신문지를 한가득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상현 작가가 처음 제품 디자인 작업을 했던 <춘면>
이상현 작가가 처음 제품 디자인 작업을 했던 <춘면> ⓒ 농심

그렇게 '춘면' 두 글자를 써서 이사에게 보냈고, 며칠 뒤 시안이 채택됐다는 연락이 왔다. 디자인팀에서 만든 여러 시안의 맨 뒤에 이 작가의 시안도 끼워 넣었는데 윗분들이 그걸 골랐다는 것. 디자인팀의 자존심은 무너졌지만 그의 첫 디자인 작업물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어느 기업 사보의 표지 작가를 2년간 맡은 일도 있었는데, 봄호에 '설렘'을 표현하려고 눈 덮인 북한산에 오른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매서운 추위와 바람을 견디며 매달려 있는 낙엽 하나였다. 그는 그 낙엽이 '이 고비만 넘기면 봄을 볼 수 있겠지'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가지 끝에 매달린 낙엽을 사진에 담고, 봄눈이 올라오는 꽃들의 사진과 합성했다. 그리고는 검은색 글씨에 색을 입혀 겨울나무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상현 작가는 이 경험을 두고 "붓, 먹, 종이, 벼루 네 가지를 가리키는 문방사우에 컴퓨터를 더한 문방오우의 시대로 걸어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이상현 작가가 작업했던 모 기업의 사모 표지들
이상현 작가가 작업했던 모 기업의 사모 표지들 ⓒ 이상현
 디자인 전문지 <정글>의 표지 디자인.
디자인 전문지 <정글>의 표지 디자인. ⓒ 정글

한글은 어떤 글자보다 아름다운 문자

그는 "한글의 이미지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한글은 다른 문자와 달리 유일하게 받침을 가진 문자예요. 자칫하면 조형이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초성, 중성, 종성 중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줄 수 있어요. 문장에 강약을 줄 수도 있고, 조형상으로는 운율도 줄 수 있죠.

문자에 전체적인 균형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글자보다 우수한 조형미를 표현할 수 있어요. 한글 캘리그래피를 처음 접한 외국인도 한글은 독창적인 아름다움으로 다가가 마음 깊이 스며들 수 있다고 믿어요."

 지난 7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대만 타위안시립미술관이 함께 개최하고 있는 <미술관에 서(書)> 전시회.
지난 7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대만 타위안시립미술관이 함께 개최하고 있는 <미술관에 서(書)> 전시회. ⓒ 타위안시립미술관

 대만 타위안시립미술관 <미술관에 서(書)> 전시회에 참가한 이상현 작가.
대만 타위안시립미술관 <미술관에 서(書)> 전시회에 참가한 이상현 작가. ⓒ 타위안시립미술관

2020년엔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으로 서예전 '미술관에 서(書)'를 열었다. 현대미술관에서 서예전이라니, 큰 변화였다. 근현대 서예부터 현대 서예라 할 수 있는 캘리그래피까지 두루 아우른 전시가 주목한 건 바로 캘리그래피였다. 캘리그래피가 전통 서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변화를 거듭해 가며 현대적 미감을 담고 있는 문자 예술로 진화해왔다는 것을 보수적인 미술계가 비로소 인정한 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때에 이 전시를 온라인으로 지켜본 대만 타위안시립미술관 관계자들이 대만에서도 전시회를 열 것을 제안했고, 4년 만인 지난 7월에 성사됐다. 그는 지난달에 대만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발표자로 뽑혀 다녀오기도 했다.

 <미술관에 서(書)>에 전시된 이상현 작가의 작품.
<미술관에 서(書)>에 전시된 이상현 작가의 작품. ⓒ 이상현

 <미술관에 서(書)>에 전시된 이상현 작가의 작품.
<미술관에 서(書)>에 전시된 이상현 작가의 작품. ⓒ 이상현

"20년 넘게 캘리그래피라는 용어를 쓰면서 서예가 많이 대중화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한국적인 이름으로 다시 바꾸면 어떨까 해요. 서예가 현대적인 소통의 작업으로도 문자 표현을 해낼 수 있다고 믿어요. 김치를 외국에서도 김치(kimchi)라고 그대로 부르듯이 다시 서예라는 우리만의 말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는 한글 캘리그래피가 잠깐의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려면 생활 속에 더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고도 했다. 좋은 글씨들이 간판과 로고 타이틀로 더 많이 쓰이면서 더 예술성 있고 수준 높은 글씨 문화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아리랑'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이상현 작가.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아리랑'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이상현 작가. ⓒ 이상현

끝으로 그는 "한국의 서예 문화 그리고 캘리그래피 문화가 세계에 더 알려질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전 세계가 한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세계 무대로 나아가고 싶다는 것.

그의 이런 노력이 더 많은 관심과 응원 속에서 꽃피우길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참고한 글]
이상현, <붓을 잡은 연기자>(2019), 심화북스.


#이상현#캘리그래피#원광대학교#서예#한글날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