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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지금, 왜 <역도산>인가?

역도산 아리랑
24.09.25 11:26l

검토 완료

이 글은 생나무글(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포스터 <역도산 탄생100주년 기념 파티> . ⓒ 김경원

<역도산 탄생100주년 기념 파티>가 오는 11월9일 도쿄의 도심 테이고쿠(帝國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다. 안내 포스터에는 '영웅 역도산이 있었기에 지금의 일본이 있다'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프로레슬러 역도산은 아톰처럼 공상만화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본인 자신들을 굴복시킨 서양세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몸으로 증명해 보였다.

1950, 60년 대 일본문화의 핵심 키워드였던 역도산!
일본 TV산업이 시작되면서 일본에서의 그의 인기는 천황 바로 다음이었다.

역도산은 끝내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 최근까지도 일본의 모든 신문과 방송, 책, 영화 속에서 그는 나가사키(長崎) 현에 있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일본인으로 그려져 있다. 전후 최고의 스타 '일본 영웅'이 조선인이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 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사회에 숨겨진 정경이다.

역도산이 왜 극비리에 내한, 판문점에서 북쪽을 향해 절규해야 했는지, 배가 북한에서 출발한 니가타항으로 '링컨컨티넨탈' 차를 몰고 급히 가야했던 이유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

역도산 그는 일본과 한국 북한으로부터 영웅으로 존경받고는 있으나, 실은 어느 한곳에서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김경원(작가)

역도산은 링 위에서 거구의 미국인과 싸워 승리하는 모습으로, 미국으로부터 원폭까지 맞고 패전한 일본인들에게 큰 용기를 심어준 사람이에요. 역도산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조선(북한)을 이어주고 싶어했어요.

딸 히로미는 조선(한국)말도 배웠고 K-문화에 푹 빠져있답니다.^^ 손녀는 아시아나 항공 스튜어디스로 6~7년 일도 했고요~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 1941~ 역도산의 부인)

역도산 아리랑
(부제: 나의 아버지와 역도산)

글:김병수(재일동포2세) 번역:김경원

내가 대학시절 때 사귀던 여성이 있었는데...올 2024년 5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와 역도산'에 관한 얘기를 처음으로 들려준 상대였다.

또 올해가 '역도산 탄생 100주년'이니 만큼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들의 영웅 '역도산'은 남한/북한/일본 3개국 세 나라에서 유일하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도쿄(東京). 재일동포 대학생들의 스터디 그룹이 개최되었다. 긴 책상 내 옆에 낯선 여학생이 걸터앉았다. 그녀는 앉자마자 "멋진 만년필이군요 내꺼랑 바꾸지 않을래요?" 라고 말을 걸어왔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산 빨간 몽블랑 만년필이었는데, 그녀의 것은 검은색 페리칸.나는 거절했다. 처음 보는 학생과 내가 기념품으로 산 만년필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스터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5월의 어두운 하늘에서 가랑비가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초봄에 내리는 비라서 교문까지 서서히 걷다 보니 마침 교문 입구에서 아까 그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녀에게는 우산이 있었기에 역까지 함께 걸어가며 비를 피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나를 가마쿠라(鎌倉)로 초대했다.
가마쿠라에서 쇼난(湘南)으로 빠지는 해안가를 걸어가노라면 해안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않는 오솔길이 하나 있다. 그곳이 그녀의 비밀 장소라고 했다.

해질녘이 다가오자 그녀가 요코하마(横浜)의 차이나타운에 가자고 했다.
오사카(大阪)로부터 도쿄(東京)에 있는 대학으로 온 거라, 요코하마까지는 가보지 않았던 터.홍창헌(鴻昌軒)의 물만두를 추천해 주었는데, 그녀는 독한 중국술에 각설탕을 넣어 마시는 술까지 주문했다. 술에 그다지 세지않은 나는 취하지 않으려고 자꾸 말을 해서 취기를 피했다.

무사시 코스기(武蔵小杉)가 그녀의 집이었다. 집 앞에는 큰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역도산의 묘지가 도쿄 어딘가에 있다고는 들었는데 어딘지 알 수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나의 아버지와 역도산과의 관계를 간추려 얘기했다.
내가 초등학생 4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역도산의 관계가 시작됐지만 조금은 맹랑한 얘기같아서 입밖에 내지는 않았었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서야 자세히 얘기하게 됐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역도산 묘소 도쿄(東京)都 오오타(大田)區 이케가미 혼몬지(池上 本門寺)에 있는 역도산 묘소. 역도산 상반신 청동 조각상이 보인다 ⓒ -출처: weblio辭典

며칠 후 그녀로부터 "장소를 알아두었어요. 가봅시다."라는 연락이 왔으며, 우리 둘은 학교에서 귀가하는 길에 만나 이케가미 혼몬지(池上 本門寺)에 있는 역도산의 묘소를 찾았다. 새벽 서너시 경. 아버지와 함께 자고 있던 방에 있는 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뭐야! 역도가 찔렸어!"
"알았어 바로 갈게!"

역도산이 칼에 찔려 병원에 실려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비서에게 아침 첫 비행기를 잡아놓으라 하셨고 도쿄로 향했다.
역도산이 입원한 병실을 찾아갔다.

"사장님, 괜찮습니다. 이 정도의 상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며 역도산은 걱정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했다. 그런데 병실을 나서자 "역도산은 이 병원에 있으면 죽게 됩니다. 다른 병원으로 옮겨 주세요."

아버지에게 병원을 옮길 것을 강력히 권유하는 남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역도산의 주위에는 도쿄 내에서 역도산의 흥행을 담당하고 있는 야쿠자 조직원들의 입김이 있었는데, 그들의 압력에 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녀는 내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의 수상의 이름은 몰라도 역도산의 이름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국민이 다 안다며, 역도산에게 그런 사실이 있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라고.

역도산의 묘 동상 옆에 있는 비석에는 출생지는 일본으로 적혀있기만 하고, 그 어느 곳에도 역도산이 조선인이라는 표기가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커다란 분노를 가슴에 안은 채 묘소를 떠났다.

가마쿠라에서 에노시마(江ノ島)로 향하는 에노시마 전차 안은 조용했다.
전차는 즐비한 집들과 아기자기 피어있는 보라색 자양화 꽃잎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달그락' 소리를 내며 나아간다.

"아버지와 역도산이 서로 알게 된 계기는 바로 나야."

나는 그녀에게 그 경위를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나는 다른 형제 모두는 민족학교에 다녔으나, 나만 집근처에 있는 일본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설날에 아버지의 친구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왔다. 부모님들의 대화를 흥미삼아 곁에서 들으며 놀고 있던 중에 아버지가 취기있는 얼굴로

"어때. 너도 조선학교에 갈래?"고 물어보셨다.
순간 나는 '전학을 가면 겨울방학 숙제 따위는 안해도 된다.'며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부터 다니기 시작한 조선학교 수업은 모두 조선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도 수업 후 선생님이 일부러 나를 위해 모르는 수업 내용과 조선어를 보충해 주셨다. 회상해 보니 같은 초등학교 3살 위에 있던 누나가 당시 유행하던 롤러스케이트장에 자주 데려다 주었다.

"다리가 불편해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해"
이렇게 격려해 주셨구나 하며 무심코 옛생각까지 떠올랐다.

일본에서 북송 귀국절차를 밟고 있는 재일동포들 . ⓒ -구글

1959년12월, 니가타(新潟)항을 출항하는 ‘귀국사업’ 제1차 귀국선. 출항 이틀 후에 북한(북조선) 청진항에 도착했다. ⓒ 김경원

그 누나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한반도 북쪽으로 귀국했다. 아니, 동해바다를 건너갔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성적이 최우등생이라며 선생님께 칭찬을 많이 들었다.

"여름방학 전에 학부모들의 참관일을 잡을 테니, 이 통지서를 부모에게 전달하라"는 안내물이 배부되었다.

밤에 귀가한 아버지께 학교에서 성적으로 칭찬받았던 일, 학부모 참관일이 있다는 사실 등을 자랑스럽게 전했다.무슨 생각을 하셨는 지, 아버지는 참관일 날에 오셨다. 매일 바쁘셨던 아버지가 자식의 학교로 참관하러 오신 것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했다.

수업을 끝내고 아버지에게 가니
"아버지는 오랜만에 아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식사하고 갈 테니 너 먼저 가거라." 하며 지인들 속으로 사라지셨다.

사건은 이 직후에 일어난다.
그날 밤 11시쯤 아래층에서 "사장님이 다쳤다!"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조심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방에는 아버지가 눕혀져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참관날 만났던 지인들과 식사를 하러 갔었는데, 파칭코업을 하는 사장과 말다툼을 하다가 유리문에 머리를 부딪쳐 다쳤다는 것이다.

도박장에 자주 다니던 먼 친척 삼촌이 아버지에게 부상을 입힌 상대가 파친코업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일은 깡패를 통해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며 앞장섰다.

노름판을 벌이고 있던 동포 야쿠자에게 상대방과 만나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한 경위를 들은 아버지는 그 동포 오야붕(보스)과 감사의 식사를 하게 되는데...

두 사람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 직업은 달라도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괴로움은 똑같이 사무쳐 있었다.

"사장님, 저와 의형제가 된 역도산도 우리와 같은 동포입니다. 흥행업에서 알고 지내다가 역도산도 동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에게 깡패 생활을 접고 함께 레슬링을 하자고 권해 주었지만 이미 저의 밑에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역도산의 경호(보디가드)는 제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다!

"사장님처럼 제조업에서 자수성가하셔서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사업을 하는 동포도 없지요. 꼭 한번 역도산을 만나 주십시오."
아버지는 그의 권유대로 역도산이 오사카에 올 때 만나겠다고 했다.

프로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 역도산을 보기 위해 TV도 사고 어느때보다도 일찍 귀가, 응원하며 시청했던 그 역도산이 같은 동포 조선인이라니!
아버지는 얼마나 놀랍고 자랑스러우셨을까!

에노시마 전차 안에서 그녀에게 단숨에 여기까지 말하고 난 다음 -평소라면 시치리가하마(七里ヶ浜)에서 내려서 우리들만의 해안가 여느 데이트 장소로 향할 것이지만, 가마쿠라까지 걷기로 했다.

가마쿠라에서 노닐다가 돌아오는 길은 후지사와(藤沢)에서 요코하마 차이나타운까지.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항구가 보이는 언덕공원에 앉아 멀리 보이는 빨간 등대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다. 그녀는 하다만 얘기를 재촉였다.
저물어 가는 바다를 보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여름도 끝나고 가을 어느 날, 그 오야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토야마(富山)에서의 시합 후 오사카에서 시합이 있으니, 그 때 역도산을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는 연락이었다.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어느 요정에서 (1961 또는 1962년) 역도산(1924 11.9~1963 12.15 )과 김영필(金永弼 강진 태생 1912 8.17~1988 11.15 필자 김병수의 부친) ⓒ 김병수(金秉秀)

1960년 11월15일.오전 10시 역도산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차를 몰고 마중을 가니, 동포 오야붕이 아버지를 모시고 역도산의 방으로 안내, 아버지를 소개했다.
잠시 잡담을 나눈 뒤 오야붕은

"오늘 저녁 경기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까 드라이브라도 하시면 어떨까요?"
하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호텔 현관에는 당시 오사카에 두 대밖에 없다는 아버지의 미국산 차 '링컨컨티넨탈'이 운전기사와 함께 두 사람을 맞이했다.
미리 예정해 놓았는지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도 차는 오사카 시내를 벗어나 이코마(生駒)산으로 향했다. 차의 운전기사는 아버지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은 동포다.

이코마산 드라이브웨이에서 정상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역도산은 자신이 태어난 곳은 북한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신풍리(新豊里)이며, 북쪽에는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결혼한 여성이 있다는 것. 이는 일본으로 건너오기 직전의 일이었으며, 일본으로 돈벌러 가겠다는 역도산을 어머니는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가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그 후 만주순업(満州巡業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을 당시, 만주에서 행해진 스모대회) 행사로 고향에 들른 것. 지금은 북조선(북한)에 15, 6살 된 딸이 있다는 것, 큰형에게 조선 씨름을 배운 것 등등의 사실을 아버지에게 세세히 고백했다.

역도산의 고향(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어린 딸을 안고 있는 역도산의 전부인 역도산은 만주에서 스모대회를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 시, 혼자만 따로 북조선(북한)에 들려 2~3살 된 딸을 만났다. 출처- ‘영웅 역도산’(저:이순일 재일동포3세) ⓒ 김경원

아버지는 역도산에게

『 나도 16살 때 가난한 고향집을 지키기 위해 혼자서 일본에 왔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일하러 나간 직장에서 일본어를 잘 못한다며 망치로 머리를 맞은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고 버텼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공장 설비를 배에 싣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도 했었다.그러자 거래처 미쓰비시(三菱)가 깜짝 놀라 지정 하청공장 간판을 들고 와서 꼭 여기서 일해 달라고 울부짖었다.그때 "나는 해방된 조선인이다!" 내가 가진 특허로 만든 부품이 없으면 그 쪽 상품은 완성되지 않지! 뭐가 하청이야!" 라고.
그랬더니 2~3일 후, 금간판 [미쓰비시 지정 협력공장] 을 윗자에 있던 부장이 직접 가져가라고 해서 가지고 왔다길래, 정 그렇다면 이쪽도 장사꾼이니 서로 협력하자며 받았다. 』

나이가 한 바퀴 아래인 역도산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타이르듯 아버지는 말했다.

『 그만 하면 되잖아.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흘린 우리의 피로 패전 후의 부흥을 이뤘고, 일본국민들에게 그대가 준 용기 덕에 패전의 백인 콤플렉스로부터 정신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나 자네처럼 재일동포들은 일본 안에서 차별과 멸시 속에 살고 있지.자네가 조선인이라고 밝힌다면 재일동포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용기를 줄 수 있을까! 』

이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역도산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얘기를 들려준 분은 사장님이 처음이에요."

역도산은 오로지 강해야 했고, 그래서 돈을 벌고 언젠가는 나라에 멋드러지게 펄럭이는 깃발을 장식할 수 있도록 그 일념 하나만으로 달려온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다.

하물며 한국전쟁에서 가족 형제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런 깊은 슬픔을 껴안고 있었다.아버지는 역도산 가족 형제의 소식, 고향의 현재 등을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해, 5월 '히가시(東)오사카'와 나라(奈良) 현(県)의 경계에 있는 아야메이케(あやめ池) 유원지에서 역도산의 프로레슬링 시합이 있다고 한다. 그날 아침 나도 데리고 가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너무 기뻤다.

오사카에서 제일가는 고급호텔로 아버지와 함께 역도산을 마중나갔는데, 이미 다른 외국인 선수들도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 보였다.

언제나 링 위에서는 목에 감긴 쇠사슬로 등장하는 털북숭이 머리모양을 한 선수가 멋진 정장을 입고 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에 나는 놀랐다.

역도산만 아버지 차에 태우고 이쿠노(生野 )구에 있는 야키니쿠(焼き肉) 식당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을 해놓았는지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역도산은 접시 한 그릇에 담긴 육회를 볼에 가득 넣고 아버지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오늘 경기는 이것으로 준비 완료입니다!"

시합장에 도착하자 대단한 인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링사이드에서 시합을 보았다.
경기가 끝나자 아버지의 링컨차가 링사이드까지 역도산을 맞으러 그 인파를 헤치고 들어왔다. 경호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역도산은 땀범벅이 된 몸으로 차에 오르고 있었는데, 역도산 앞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물결에 나는 아버지와 떨어져 버렸다.
아버지가 큰 소리로 "병수야!!"라고 불렀으며, 나도 큰 소리로 "아버지~!!"라고 외쳤다.
모세의 기적의 바다는 아니지만 경호를 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차가 있는 곳까지 길을 비켜주었고 그 사이를 나는 절뚝거리며 걸었다.

당시 역도산 경기의 경호를 맡은 이들은 아버지에게 역도산을 소개했던 오야붕의 조직이었다. 그 젊은이들 속 상당수의 젊은 동포들은 나의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아! 조선말이다!"

저 구름바다처럼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천하의 역도산이 올라탄 차에 응답하는 소리였다!

북한(북조선)에서 만든 역도산 기념우표 (1995) ⓒ 김경원

역도산을 태운 차는 나라(奈良)에 있는 요정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서로 원수처럼 링 위에서 싸우고 있던 외국인 레슬러와 일본측 선수, 관계자 총 30명 정도가 큰 사랑방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다.

역도산도 몸을 씻었는 지 산뜻해진 얼굴로 주빈석에, 아버지는 그 옆에 계셨다. 당연히 어린 내가 동석할 이유도 없어 그 광경만 엿보았다.

아버지가 기다리라고 한 대기실 같은 방에서 준비해 준 간식을 먹고 요정의 현관입구에서 신발을 지키고 있는 아저씨와 놀고 있었다. 현관문에는 커서 신발장에 들어가지 않았던지 몇 켤레 신발들이 현관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게 자이언트 바바(馬場)의 신발이란다."
조각배 같은 신발을 가리키며 아저씨가 설명해주는 것을 듣고서 그의 구두를 신어봤다. 내 발은 3분의 1이나 찼을까?

아버지가 현관문에 놓여있던 전화기 있는 곳까지 오셨고 "잠시 후에 역도산과 함께 집에 갈 테니 음식을 준비해 두라."는 어머니와 통화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아버지와 역도산은 연회장에서 나왔고, 두 사람은 현관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아버지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나라에서 우리집까지 가려면 이코마산을 넘어야 했다.
당시 한나(阪奈)도로가 있었는데 이코마산 중턱에 있는 우리 집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운전기사는 아버지로부터 이 날 나라의 요정에서 사장의 집까지 간다는 예정을 듣지 못했는지 그가 초조해 하는 것이 조수석에 있던 내게도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길을 잃어버렸으며, 점점 산길의 좁은 길로 커다란 링컨차를 몰아들어갔다. 좁은 오솔길 L자형 모퉁이까지 왔을 때는 좌회전 해서 차가 갈 수 있는 지 불안해 했다. 운전기사는 아버지의 질타에 "잠시 앞 좀 보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차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서둘렀다.

그러나 차를 세웠던 길은 완만한 경사길로 정면에는 콘크리트 울타리다. 사이드 브레이크 거는 것을 깜빡 잊었던지 차는 벽을 향해 서서히 달리기 시작한다.

뒷자리에서 아버지와 역도산의 "우오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릴 적부터 다리가 불편했던 나는 자주 아버지의 차를 타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기사가 운전을 하는 동작을 잘 봐두었기에, 나는 브레이크 페달을 단번에 밟아 차를 세웠다.

잠시 후 운전사는 돌아왔고 아버지로부터 크게 혼났다.
역도산은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나는 칭찬을 받은 김에 역도산의 돌덩이 같은 손을 만져보며 물었다.

"그렇게 피를 흘리거나 의자로 맞아도 괜찮은 거예요?"

"응, 그렇게는 보여도 어느 정도 봐주고 하는 거니까 괜찮아. 하지만 챔피언 벨트가 걸린 시합만은 진지하지."

집에 도착하자 아버지 회사의 중역(재일동포) 2명과 어머니 누나 2명, 여동생, 동생들이 현관에서 역도산을 영접했다. 방에는 언제 준비를 하셨는 지 상위에는 산해진미가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한국에서도 입맛 까다롭다는 목포 태생으로 요리를 잘하시니 아버지도 그것이 자랑이었다.

역도산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지방에서 맡아온 명태조림 내음을 그리워하면서 냄비 가득 담겨있던 음식을 혼자서 단번에 먹어 치웠다.

술을 마시며 환담이 이어지자 역도산은 동포들에게 둘러싸여 마음이 놓였는지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노래하는 흥겨운 <아리랑>이 이들과 다시 함께 한 것이다.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내는 낭랑한 노래... 또 곡명은 모르지만 신나는 리듬의 민요들을 부르고, 어른들은 젓가락으로 상을 때리며 리듬을 만들며 흥이 올랐다.

연회에 사용된 방에서는 마당의 큰 소나무가 보였는데, 그날 밤은 보름달이었다. 밤도 깊어 연회를 마치고 역도산은 아버지의 차로 호텔로 향하게 된다.

현관문에 있는 주황색 전등불 밑에서 역도산은 우리 조선말로

"안녕히 주무십시오. 오랜만에 조선말을 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하던, 역도산의 그 미소를 나는 평생토록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이 장면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 일본에서는 1959년 12월부터 재일조선인의 귀국사업이 시작된다.
북조선(북한)으로 향하는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배우자 등를 실은 귀국선은 니가타(新潟)와 청진 사이를 오가는 배가 빈번했다.

그 즈음 역도산의 품으로 북쪽에 있는 큰형 김항락(金恒洛)에게서 편지가 온다. 역도산은 형제 모두 건강하고 역도산의 딸 김영숙(金英淑 1942년 생)도 건강하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 국제우편이 없던 그 당시에는 배를 통해 인편으로나마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후에 부모님의 생존을 확인한 역도산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또 그는 처 박신봉(朴信峰)이 병사했다는 그녀의 마지막 소식도 인편을 통해 알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마음을 알고 어떻게든 형제와 딸을 재회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분주하게 서둘렀다. 그 일은 의외의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昭和34(1959)년 니가타(新潟)항을 출발하는 북한(북조선) 귀환사업의 제1선 <크릴리온 호>소련선적(船籍). 재일조선인의 귀국사업은 1959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으로 향하는 재일조선인을 실은 귀국선은 니가타와 청진 사이를 빈번하게 왕복했다. ⓒ 김경원

1961년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경.
아버지의 차는 역도산을 싣고 니가타(新潟)로 향했다.
-귀국선은 이 달에만도 5차례 니가타에 입항했다- 니가타에는 북한으로 귀국하려는 재일동포들을 실어 나르는 소련선적(船籍)의 배가 왕래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배에 북한에서 역도산의 딸과 형이 타고 올 거라는 연락을 받고 차를 몰았다.
도중에 심한 비를 맞아 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차를 모는 것을 역도산은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한시라도 빨리 딸과 형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역도산은 말했다.

"내가 운전하겠다."

역도산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조심스레 달리는 주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쏜살같은 속도로 니가타항을 향해 달렸다.

조선중앙TV 기록영화에 소개된 프로레슬링 영웅 역도산(본명 김신락)과 북한에 살고 있는 그의 첫 번째 딸 김영숙(1942년 생) ⓒ 촬영: 북한 조선중앙TV (2005.4.6)

북한은 함경남도 출신의 역도산을 '김일성 주석이 총애한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과 TV드라마, 영화 등을 꾸준히 제작해왔다.
특히 김영숙 씨의 남편으로, 역도산의 사위인 박명철이 북한에서 체육상을 지내는 등 역도산 집안은 북한 체육계 곳곳에서 활약했다.
평양체육대학을 나온 박명철은 내각 체육지도위원장을 거쳐 체육상을 지냈고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박 전 체육상의 딸이자 역도산의 외손녀인 박혜정은 북한 최초의 여자역도 감독으로 유명.
박 전 체육상의 여동생 박명선은 내각 부총리를 거쳐 인민봉사총국장과 역기(역도)협회 위원장을 겸임. 또 다른 여동생인 박명순은 당 경공업부 부부장으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김정숙 평양방직공장 현지지도를 수행하기도 했다.

역도산은 배에 올라 타자마자 서둘러 그들을 찾았으나, 십수 년 만에 형님 그리고 딸과 재회하는 것이라, 처음엔 서로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번 일본에 온 둘째 형과는 역도산이 어릴 때 헤어졌였고, 딸과는 3살 때 잠깐 만난 이래 약 15년 만이다. 18세 숙녀가 된 딸은 정작 아버지 역도산을 만났으나, 아버지로서 실감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아버지가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살고 있지않은가. 아버지를 받아들이기에 착잡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

역도산은 딸로부터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자신을 닮아 체격도 좋은 딸이 농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몇 년 뒤 도쿄올림픽에 꼭 선수로 오라고 당부를 했다.

배 안에서 이루어진 환영회에서는 술에 취해 여러 번 노래 <아리랑>을 불렀고 "나도 조선 사람이야~!"라고 외쳤다 한다.

결국 딸에게서 '아버지'라는 이 한마디를 듣지는 못하고 헤어졌으나, 북으로 돌아가는 2박(泊)의 배 안에서 딸은 차마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아버지~~!아버지~~!" 라고 울부짖으며 돌아갔다고 하는 얘기를 훗날 들었다고.

얼마 후 아버지는 역도산의 집에 영사기사를 데리고 방문하게 되는데...
북한에서 찍어온 다큐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역도산의 집을 찾은 것이다. 방에는 아무도 못들어오게 했고, 영사는 시작되었다.
그것은 김일성 주석이 현지지도를 하는 기록영화였다.

"농촌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지요. 아버지의 벌이가 안좋아 어머니가 방앗간을 하셨거든요~ 여기는 내가 살던 고향의 농지같은데...벼농사가 잘안되는 곳인데요...누구보다도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그걸 잘 압니다. 그런 곳을 이렇게까지 풍년이 되도록 바꾸어 놓으시다니! 지도를 하고있는 이 분은 정말 훌륭한 지도자에요!!"

라며 역도산은 김일성을 치켜세웠다.

"그렇다면 내년에 김 주석의 50번째 탄생일에 맞춰 우리 동포들도 선물을 하기로 했는데, 당신도 함께 하지?"

아버지는 역도산에게 이렇게 권했다.

김일성 주석 50주년 탄생(1962.4.15)기념으로 역도산이 선물한 벤츠 승용차 . ⓒ 촬영:이토 타카시(伊藤孝司)

역도산이 서거한 지 43년이 흐른 2006년 3월2일, 사진가 이토 타카시(伊藤孝司)는 북한 묘향산(평양의 교외)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 에 전시되어 있던 벤츠 승용차의 대시보드에서 역도산 친필로 쓰여진 선물목록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 이토 타카시(伊藤孝司)

1962년 봄, 역도산은 그가 타고 있던 벤츠승용차를 탄생 50주년 기념으로 김일성 주석에게 선물을 했다 ⓒ -구글

며칠 후, 역도산은 김일성의 생일 축하품으로써 현지지도를 하는 자에겐 차가 최고일 거라며 그의 집 차고로 아버지를 안내했고...

최고로 고급스러운 롤스로이스를 선물하고 싶다는 역도산에게 아버지는

"김일성 주석은 왕후귀족이 아니니까, 또 현지에서 지도하기로 바쁘게 다니니 만큼, 튼튼한 벤츠가 좋을 것이다."
라며 벤츠를 권했다. 그 말에 역도산은

"그렇다면, 내가 타고 있는 중고 벤츠보다야 지금 새 벤츠를 주문해 놓았으니 그걸 선물하십시다."
라고 했으며, 아버지는 답했다.

"생일 선물이니 만큼 생일날에 맞춰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이리하여 역도산은 결국 자신의 차고에 놓여있던 벤츠 한 대를 1962년 4월15일 김일성 생일에 맞춰 선물하게 되었던 것이다. -2024.9.3 부평에서 씀

* 필자 김병수(金秉秀)
1950년 오사카(大阪) 태생. '제1회 부산바다축제 세계재즈페스티발'(1996)을 주관, 프로듀서로서 내한. 이후, 색소폰 연주 교육자로 부평에 정착. 최근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일무역 및 한일문화교류 사업에 종사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 역자 김경원(金京媛 )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사진작가>로 당선
제2회 Beseto연극제 <덕혜옹주> 자막번역 (도쿄/소우게츠 草月 홀)
극단 '세이넨단(靑年團)'의 <도쿄노트> 자막번역 (예술의 전당·토월극장)
2002/6/24 『일본·조선·한국의 작곡가에 의한「아리랑 주제에 의한 변주곡」집』
"아리랑은 무엇인가?" 일본어 강연 (요코하마/시립교육회관)
저서 : 희곡 <당신 누구요? -김산과 나운규의 100년 아리랑>(한빛코리아)
역서 : <현대일본희곡 10선> (예술기획)
논문 : <일본민요 '이츠키자장가'와 '아리랑'의 관계>(1995 민요론집)
수상 : 1998 '제3회 아리랑연구상'(이사장:한완상), 2024 '제6회 대한민국인권대상' 사회공헌(나눔) 부문



* 역도산 <力道山 리키도잔. 본명:김신락(金信洛) 1924.11.9~1963.12.15>

‘일본프로레스링의 아버지’로 불리는 역도산(신장:176cm 몸무게:116kg)은 일본 전후 시대 최초로 ‘저팬드림’을 가장 완벽하게 이뤄낸 영웅이었다. '천황 다음 역도산'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인기와 명성을 구가했다. ⓒ -구글

본관 : 김해(金海) 김씨.
일제치하, 농부 김석태(金錫泰 농부 지관)의 셋째 아들로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 용원촌(洪原郡 新豊里 龍源村)에서 1924년에 태어나 함경도와 만주 간도를 떠돌며 생활하던 중 14살 때 씨름대회에 나가 우승을 거둬 그 용력을 자랑한다.

1939년 16세의 김신락을 씨름대회에서 처음 본 일본 스모(일본식 씨름)계의 거물 타마노우미 우메키치는 김신락을 일본의 스모계에 등단시키려 한다.

처음에 김신락은 "일본 사람이 되기 싫다. 고향에서 살겠다."고 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돈벌러 일본으로 가겠다는 역도산을 강제로 결혼까지 시켰으나, 결국에는 타마노우미의 끈질긴 권유로 1939(또는 1940)년, 10대 후반의 나이로 일본행에 몸을 싣게되고 시쇼노세끼의 한 스모 선수 양육소에서 스모 선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일본에 도착한 김신락에게 주어진 것은 위조된 호적등본이었다.

본명 : 모모타 미츠히로(百田光浩)
생년월일 : 타이쇼大正13(1924)년 11월14일
본적 : 나가사키(長崎)縣 오오무라(大村)市

뿐만 아니라 김신락의 초등학교 졸업증명서까지 완벽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김신락은 역도산(力道山)이라는 별명으로 일본씨름을 시작했다.
그의 좌우명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였다.
하나 밖에 없는 씨름판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선배선수들 뿐이었는데, 역도산은 그들에게 끼워달라며 끈질기게 설득, 하루에도 몇 번이고 선배선수들에게 내동댕이쳐지면서까지 연습을 했다.

1940년 처음 스모대회에 출전, 승리를 거듭함으로써 인기를 얻으며 승진한다.
1949년 세키와키(關脇)에 등극했으나, 내장 디스토마에 걸려 패배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쉬지않고 스모대회에 출전, 이해 10월 10승5패라는 기록을 남긴다.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그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으나 1950년 8월25일 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스모 선수의 상징인 존마게(ちょんまげ 丁髷) 상투를 부엌칼로 잘라버린다. 홀로 '단발식'을 거행한 것이다.
스모계에서 누구보다도 빠른 성공을 손에 넣었으나 더 이상의 등단을 기대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스모협회 측의 홀대, 사범과의 불화, 한국전쟁의 시작 등 복합적인 문제가 원인이었다.

스모계를 떠난 역도산은 건설회사의 경호원으로 일하던 중 프로레슬링계에 발을 들인다. 1951년 세계적인 프로레슬러인 브란스(Branth B.)의 일본원정을 계기로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것.

1952년 2월, 미국으로 도미한 그는 본격적인 프로레슬링수업을 하는데, 하와이 훈련 동안 그는 모래사장을 달리는 것이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이전까지 스모 선수 특유의 펑퍼짐한 체격이었던 역도산은 하루에 1000번씩 복근운동을 하는 맹렬한 훈련을 거쳐 프로레슬러다운 몸매로 자신의 신체를 바꾸고 만다.

그는 1953년 일본 처음으로 프로레슬링 협회를 창설, 일본 첫 프로레슬러로서 TV의 영웅으로 부상케 된다.

전쟁에서 실패해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있던 일본 사회는 영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까만 타이츠를 입고 스스로 고안한 가라테촙(chop)을 무기로 역도산은 거대한 미국 선수들을 한 명씩 쓰러뜨려 눕혔다. TV가 궁하던 시절, 길거리TV 앞에 모인 사람들은 그러한 역도산의 모습에 열광했으며, 역도산의 인기에 불이 붙을수록 TV판매량도 늘어만 갔다. 역도산은 반칙을 일삼는 레슬러와는 달리 정정당당하게 싸웠으며, 그러한 그의 모습은 일본인 모두의 마음을 사로 잡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영웅'이 되어버린 그를 일본인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영웅=일본인'이란 공식 속에서 그의 위조된 과거는 기정 사실화되어만 갔다.

그가 인기 절정인 무렵, 재일한국인 시인 김소운(金素雲)은 자신의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일본인들이 역도산이 조선 사람인 것을 알게된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

강인한 체력과 태권도를 특기로, 1957년 세계선수권자인 루테스(Luthes J. S.)를 물리쳐 헤비급 세계챔피언이 된 이후 19회에 걸쳐 선수권을 방어, 1958년 월드리그전(World League戰)을 창설했고, 그뒤에도 세계의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며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을 했다.

많은 재산을 모아 일본 굴지의 부호가 된 프로레슬러 역도산은 여러 개의 체육관과 흥행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또 1964년 도쿄올림픽에 자신의 딸이 북한 선수로 참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역도산은 경비 일체를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밝힌다.

북한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남한에서는 친북인사로 상반된 평가를 받던 그를 1963년 초,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해방 수 처음 남한을 방문하게 된다. 극비리에 이루어진 내한이다.

서울시장으로부터 '명예 시민상'을 수여받고 김종필 총리 자택으로 초대되는 등 숨은 외교사절로서 한일우호 관계 회복에도 크게 공헌을 했다.

또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해 서울에 스포츠센터의 건립을 약속도 했으나, 이 해 12월8일 심야에 도쿄 도심의 나이트클럽 '뉴라틴쿼터'에서 폭력단 스미요시(住吉) 일가(一家) 단원 무라타 가츠시(村田勝志)의 칼에 복부를 찔려 부상을 입었다. 수술 후에 생긴 화농성 복막염으로 12월15일 향년 39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역도산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의료과실이라는 주장과 함께 음모론도 대두됐다. 2003년, 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는 역도산의 사망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마취 실수'라는 의료사고였다고 공식발표했으나, 의료사고임을 입증하는 부검결과가 공개되지는 않아 역도산의 '어처구니 없는'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역도산을 찔러 숨지게 한 야쿠자 무라타 가츠시(村田勝志)는 재판장에서 징역 7년형이 선고받았고 복역 후 2013년 4월9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74세에 당뇨병으로 병사한다.

역도산은 한밤중 친구가 운영하는 음식점을 찾아가 불고기와 김치를 먹은 뒤 껌을 한웅큼 입속에 넣어 입에서 마늘 냄새를 없앴을 정도로 자신이 조선인임을 숨기려 했다.

"력도산이 조선 사람이면서 일본 선수라는 욕된 운명을 진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식민지 통치가 빚어낸 후과이다." 이는 김일성 주석이 역도산에 대해 언급했던 말이다.

역도산은 그 누구보다도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절실히 염원했다고 한다. 또 분단된 내 조국이 하나로 통일되어 스위스처럼 중립국가가 된다면 좋겠다고도.
* 역도산의 가족들

1963년 1월7일, 도쿄에서 약혼 발표 기자 회견을 하는 리키도잔(역도산. 본명:김신락金信洛)과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 1941~ ). 다나카 게이코는 일본항공 스튜어디스로 입사했던 시기에 찍은 그녀의 사진 한 장이 역도산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제를 시작, 1963년 6월5일 역도산과 결혼. 역도산 사후인 1964년 딸 모모타 히로미(百田ひろみ)를 출산, 현재에도 역도산을 추모하며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구글

역도산의 장례식장. 도쿄(1963.12) 좌부터-모모타 치에코(百田千榮子 1944년생 차녀) 모모타 미츠오(百田光雄 1948년생 차남. 프로레슬러) 모모타 요시히로(百田義浩 1946~2000 장남. 프로레슬러, 링아나운서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 역도산의 부인) ⓒ -제공: 일본스포츠(일간지)

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 1941~ 가나가와神奈川 경찰청 소속 치가사키茅ヶ崎 경찰서장의 딸)는 1963년 6월5일 역도산과 일본에서 정식으로 결혼해 혼인신고를 한 첫 일본인 여성으로, 결혼한 지 6개월(193일) 만에 역도산이 사망함으로 미망인이 된다. 역도산 사망 당시 그녀는 임신 중이었으며 다음 해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딸 모모타 히로미(百田ひろみ 1964년생)를 낳아 길렀다.
역도산의 팬들이 만들어 놓은 '게이코의 재혼을 반대하는 모임'도 있었는데..아무튼 지금까지 홀로 독신으로 살고 있다.

따지자면, 다나카 게이코는 세 번째 부인인 셈이다.

두 번째 부인은 게이샤(芸者) 출신의 오자와 후미코.
해방 전에 사귀던 교토(京都) 거주 여성이다. 역도산이 일본에 건너와 무명의 스모선수 시절에 만났었고, 1958년까지 살다가 이혼. 두사람 사이에는 2남1녀가 있다. 1944년 장녀 모모타 치에코(百田千榮子)가, 1946년 장남 모모타 요시히로(百田義浩 2000년 死)가, 2년 후 차남 모모타 미츠오(百田光雄)가 태어난다. 역도산의 손자는 모모타 치카라(百田力)로 1981년 생이다.

다나카 게이코는 역도산과의 결혼식 전에 천식으로 입원 중인 역도산의 전부인(게이샤 출신)에게 전부인이 낳아 길렀던 어린 아들(요시히로, 미츠오)들을 데리고, 병문안을 다녀왔다.

책 <역도산 미망인>(저: 호소다 마사시 細田昌志) 小學館 2024 ‘제30회 小學館논픽션대상 수상작’ ⓒ 김경원

다음은 북한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전시된 김일성 주석의 벤츠승용차를 (2006)촬영했던 사진가 이토 타카시(伊藤孝司)의 한반도 관련 작품들이다.

일본영화 <히로시마 평양: 버려진 피폭자> 2009 감독/촬영/나레이션:이토 타카시伊藤孝司) 음악:하홍철(河弘哲) 출연:이계선(李桂先) 허필년(許必年) 낭독:신야 에이코(新屋英子) ⓒ 김경원

책 <무궁화의 슬픔 [증언] ‘성노예’가 된 한국 조선인 여성들> (저: 이토 타카시 伊藤孝司) 후바이샤風媒社 2019 ⓒ 김경원

책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저: 이토 타카시 伊藤孝司) 후바이샤風媒社 2020.7 ⓒ 김경원

사진전 포스터 <이토 타카시(伊藤孝司)의 사진전 ‘평양의 사람들’> '고려박물관' (도쿄 2023.5.3.~7.2)에서 ⓒ 김경원

* 사진가 이토 타카시(伊藤孝司)
1952년 나가노(長野) 태생. (사)일본사진가협회회원/일본 저널리스트회의 회원
사진을 통해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아시아 민중의 시각으로부터 보고자 애쓰는 일본인 사진가.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일본국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아시아 사람들, 일본이 끼치는 아시아에서의 대규모 환경파괴를 취재해서 잡지·TV 등에 발표했다.
한(조선)반도의 취재에 힘을 쏟고 있으며 한국47회, 북한(북조선)43회 째 하고 있다. 한반도 포함 아시아 태평양 나라에서의 취재는 거의 200회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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