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다. 이제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 말을 새겨보니 금언이라, 이즈음 가능한 이를 실천하려고 애써 노력한다. 그런데 평생 아파트 한 번 분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좀 창피한 얘기로 늘그막에 내 이름으로 된 단 한 뼘의 부동산도 없는, 지지리 못난 나로서 솔직히 열 지갑도 없다.
그래서 가능한 입을 닫고 지내면서 이즈음 내 언저리를 하나하나 정리하며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1980년 초 이태 동안 국어를 가르친 바 있었던 김홍걸 전 의원의 얘기가 요즘 늦더위보다 더 뜨겁게 SNS를 달구고 있다. 이대로 계속 지켜보기만 할까? 아니면 서로 마주 앉아 그간의 곡절을 보다 자세히 들어볼까? 무척 망설였다.
그런 가운데 그의 어머니 이희호 여사님 생전, 마지막 만났을 때, 그분이 어찌나 내 손을 꼭 잡으셨던지 지금도 그 손아귀의 장력이 남은 듯하다. 그 의미를 되새기자 당신 내외 사후 어려울 때 당신 아들 곁을 지켜 달라는 부탁 같아서 일단 한 번 만나 그의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사람이 살다가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는 누군가 곁에 있기만 해도 얼마나 위안이 되겠는가.
마침 일전에 서울에 사는 여동생이 골절상으로 입원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문병을 가야겠다고 작정을 한 다음, 이 기회에 김 의원도 만나야겠다고 그에게 연락을 했다. 이즈음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부산하겠지만 침착한 그는 예사 때처럼 반갑게 시간을 내겠단다.
지난 주말, 서울 도봉구 한 병원에 입원 중인 여동생을 문병한 다음, 곧이어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그와 나의 대화는 그새 4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제나 이제나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다. 나는 주로 듣기만 하고 간혹 몇 마디 조언을 했지만, 행여 사제 간의 대화가 잘못 변질돼 다른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하고자 이 글에서는 고주알미주알 밝히지 않겠다.
나는 한 때 그를 가르쳤던 훈장으로서, 그에게 원론적인 얘기와 자네 아버지는 사형수로 교도소 안에서도 내일을 준비하고자 공부했다는 얘기 등으로, 이 힘든 시기를 부족한 실력 쌓는 시간으로 전화위복, 슬기롭게 잘 넘기라는 덕담을 한 뒤 그의 환송을 받으면서 귀가했다.
그의 고교 시절, 내가 교실에서 본 김홍걸 학생은 대단히 과묵하고 인문 지식이 넓고 깊은, 특히 시를 잘 쓰는 모범 학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통일운동가로 활약한 뒤 훌륭한 시인으로 인생 마무리하기를 기원한다.
[관련기사] 홍걸군, 그 시절 자네는 문학청년이었지(http://bit.ly/1dMhyp)
덧붙이는 글 | (여분 사진 1장 편집부 판단으로 처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