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겨울, 익산 중앙동의 어느 화실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민기 대표의 모습
여장수
그렇다고 김 대표의 삶이 고달프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여장수 전 백제고 교장은 청년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와 자주 어울렸다고 했다. 김 대표보다 일곱 살이 많은 그는 꼬마 김민기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행사 때면 어린 민기를 꼭 앞에 세우고 오프닝 멘트를 시켰다"고 했다. "말도 잘 하고 인물도 좋고 참 똑똑했던 아이"였다는 것.
한참 세월이 흘러 김 대표가 석암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여 전 교장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를 만났고, 얼마 뒤 그를 중앙동에서 화실을 운영하던 동네 후배이자, 어릴 적 김 대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던 김영규 화백에게로 데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이 치러지던 1979년 11월 3일, 그날 김민기 대표는 두 사람 앞에서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다.
"화실에 싸구려 클래식 기타가 하나 있었는데, 민기가 가져다가 치는데 자알 치더라고. 내가 칠 때는 싸구려라 소리도 안 좋고, 다른 사람들도 별로 거시기하고 그랬는데, 민기가 치니까 너무 좋은 거야. 이거 내 기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소리가 촤악 가라앉아 가지고, 정말 깜짝 놀랬어." - 김영규 화백, 필자와의 인터뷰
또 여 전 교장은 김 대표가 익산을 떠난 건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감시를 못 견뎌서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보다는 농사를 더 크게 짓고 싶은 바람이 컸다는 게 여 전 교장의 생각이다. 실제로 김 대표는 농사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기 시작하면서부터 더 큰 땅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곤 했다는 것. 어쩌면 그 무렵 그는 정말로 농사꾼으로 살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또 여 전 교장은 "사람들은 김민기를 좌도 우도 아닌 회색주의자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1980년 5월, 민기한테 급하게 연락이 왔는데, 군인들이 광주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카메라를 들고 광주로 가자고 했다. 그 현장을 사진으로라도 남겨서 알려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망원렌즈를 구해 다음날 정말 민기랑 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전남 장성에서 총을 든 군인들에게 가로막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했다."
농촌 지도자 김민기, 생태주의자 김민기
익산에서 1년 정도 농사를 배운 김 대표는 김제로 옮겨가 2년간 열 마지기(약 6600㎡) 논에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2년쯤 지난 1982년 4월, 이번엔 멀리 경기도 연천군 전곡으로 떠난다. 작은아버지가 전곡 읍내에서 '이리철물점'을 운영하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김 대표는 작은아버지 소개로 민통선 너머 북녘 하늘과 맞닿은 '유촌리'에 자리를 잡는다. 이 마을에서 '새 김씨'로 불렸다는 그는 어느새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농촌 지도자'로 거듭나 있었다. 1987년 여름, 조철현 기자를 만난 마을 청년 신동렬은 김민기 대표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했다.
"우리들 모두에게 그 형님은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지금은 이 마을을 떠나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그 형님의 끈끈한 정은 이 마을에 수도 없이 남아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만나서는 농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고요." - 조철현, "'긴 밤 15년' 최초 독점 인터뷰, 김민기", <마드모아젤>(1987.8)
김 대표는 동네의 옛 이름을 딴 '두개마을 청년회'를 꾸리는가 하면, 동네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로 가져다가 팔기도 했다. 중간유통 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들이 피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참이 지난 그때까지도 유촌리 사람들에겐 이 일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김민기 대표도 조철현 기자에게 "참 정이 많이 들었던 동네였다"면서 "아주 눌러 살려고도 했던 곳"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1983년 겨울, 그가 살던 집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이 나는 바람에 그는 전곡을 떠나야 했다.
"늦게야 사실을 알고 달려온 민기는 차라리 담담해 하더군요. 막걸리를 받아오라고 시켜서 그 불길 옆에 앉아 밤새도록 술을 마셨어요. 워낙 갑작스런 일인지라 뭐라고 위로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술만 마셨지요 뭐." - <마드모아젤>(1987.8)에 실린 마을주민 신동직씨의 말)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곡을 떠난 그는, 마침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친구의 부탁으로 서울에서 어린이 뮤지컬을 준비하게 된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도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고, 결국 뮤지컬은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70년대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창작 작업도 여건이 안 되고 결국 <공장의 불빛> 직후 촌으로 내려간 것처럼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김지하, 장일순 선생님 등과 어울리는 중에 '그렇다면 근본적인 것은 뭐냐?' 하는 뻔한 화두에 몰입했고 그것이 '한살림 모임'으로 이어졌다." - 김창남이 쓴 <김민기>(2004)에 실린 강헌과의 인터뷰(계간지 <리뷰> 1998년 여름호에서 발췌)
그의 말처럼 그는 농사꾼으로 사는 동안 생태농업에 눈을 뜨고 생태주의와 생명사상에도 깊이 빠져들었던 걸로 보인다. 1970년대 초반, 선배이던 김지하의 소개로 강원도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만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김 대표는 1989년 장일순 선생 등과 함께 '한살림모임'을 꾸리고 초대 사무국장까지 맡았다. 1990년 모처럼 출연한 TV 인터뷰에서도 그는 이러한 생각을 거침없이 꺼내 놓았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라든가 사회주의라든가, 겉으로 보면 굉장히 대립하는 구조죠.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두 가지가 다 한 가지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봐집니다. 그 한 가지 원리는 산업화죠. 산업문명을 이루자. 산업문명을 이루는 데 주도권 쟁탈에 있어서 이런 방식이 옳다, 저런 방식이 옳다라고 싸워왔다고 봐집니다. 그런데 이제는 산업문명 자체가 한계에 와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그 세계관의 방식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시점에 와있는 것 같아요." - KBS TV <11시에 만납시다 – 겨레의 노래를 찾는다(김민기)> (1990.2.27.)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아직 덜 알려진 '김민기의 고향에서의 삶', 또 '농사꾼으로서의 삶'을 기록하고 알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믿는다. 그의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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