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8 07:04최종 업데이트 24.07.05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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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남쪽 끝을 흐르는 만경강 ⓒ 윤찬영


전북 익산이라는 도시를 이해하려면 먼저 물길을 살펴야 한다. 익산은 철길과 물길이 만나 만들어진 도시니까.

익산은 금강과 만경강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물줄기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흔치 않은 도시다. 도시의 북쪽 끝을 흐르는 금강엔 조선시대부터 '조창'이 있어 주변 평야에서 거둔 곡식을 모아두었다가 배에 한가득 씩 실어 한양으로 날랐다. 거꾸로 이 물길을 따라 금강 건너 북쪽에서부터 새로운 문명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하여 금강은 익산에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금강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도시의 남쪽 끝을 흐르는 만경강도 금강 못지않게 중요한 물줄기였다. 만경강은 익산의 동쪽에 자리한 이웃 도시 완주에서 발원해 전북 서부의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서해에 닿는다.

"너의 빈자리를 / 너라고 부르며 / 건널 수 없는 / 저녁 썰물의 갯벌 / 만경강에 바친다."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쓴 책 <자전거여행> 앞머리에 이런 글을 남겼다. 대체 그는 만경강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대간선수로, 도시를 지나는 또 하나의 물줄기
 

만경강 풍경, 만경강은 오랜 세월 개발에서 비껴서있었다. ⓒ 윤찬영

 
만경강 주변에 사람이 뿌리를 내리고 농사를 지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밀물 때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물길을 거슬러 한참을 올라왔고, 비라도 쏟아지면 강물이 넘치기 일쑤여서다. 1700년대가 다 돼서야 둑을 쌓아 올리고 그나마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던 걸로 보고 있다. 소금을 머금은 바닷물이 더는 위로 거슬러 오르지 못하게 '만경강제수문'을 만든 건 1970년의 일이었다. 

190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인들은 전북 서부지역의 너른 들판을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이 가운데 만경강 주변의 황무지를 눈여겨본 이들도 있었는데, '후지이 간타로'도 그랬다. '불이흥업주식회사'라는 거대 농업회사를 세운 그는 군산 앞바다를 메워 무려 2000만㎡(2000정보)에 달하는 농지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알다시피 벼를 키우는 데는 물이 많이 들어간다. 익산엔 미륵산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높은 산도, 물을 가둘 큰 호수도 없다 보니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 놓여있다해도 정작 도시 한복판의 너른 들판을 적실 물은 늘 모자랐다. 그래서 많은 논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만을 바라는 처지였다(이런 논을 '천수답'이라고 부른다).

후지이 간타로는 논에 물을 댈 방법을 찾다가 익산 황등·삼기면 일대에 아주 먼 옛날(벽골제보다 630년 앞선 기원전 3세기로 추정), 황등제라는 둑을 쌓아 만든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걸 되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오늘날 원광대학교 뒤쪽이다.

그는 조합을 만들어 돈과 사람을 모으고, 멀리 삼례에서 만경강 물을 끌어오려고 땅속에 커다란 물길도 뚫었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생각만큼 많은 물이 모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더 큰 일을 벌이기로 한다. 멀리 완주 동산면 대아리의 높고 깊은 산속에 커다란 댐을 만들어 더 많은 물을 모으고, 이를 익산·군산까지 끌어오기로 한 것. 그러려면 70km에 달하는 긴 물길을 내야 했다.
 

1922년에 완공된 대아댐 공사 모습 ⓒ 미상

 

1920년대 대아댐 공사 모습, 깊은 산속에서 진행된 당시 조선 최대의 공사였다. ⓒ 미상

 
그는 다시 조합을 만들고, 이번엔 조선총독부와 은행의 자금 지원을 끌어내 이 무모해 보이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1922년 마침내 약 2000만 톤에 달하는 물을 가둘 수 있는 대아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일본인들이 독일 기술을 들여와 만든 '조선 최초의 근대식 콘크리트 아치댐'이었다. 그 시절 '조선 최대의 대공사'로 꼽힐 만큼 힘든 작업이기도 했다. 

이 댐에 들어간 시멘트와 온갖 기계장비, 심지어 시멘트에 섞을 화산재까지도 모두 일본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준공식은 이듬해 6월 익산에서 열렸는데, 조선인들도 불러 3일 동안 큰 잔치를 벌였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도 참석했다. 사이토 총독은 댐 꼭대기에 돌로 새긴 '滿不溢酌不竭'(만불일 작불갈, 가득해도 넘치지 않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이라는 글씨도 직접 썼다.

지금은 이 댐을 볼 수 없다. 1989년 댐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더 높게 댐을 올리면서 옛 댐은 물에 잠겼다(물 높이가 40% 밑으로 내려가면 옛 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 댐에 가둘 수 있는 물의 양은 100년 전보다 약 2.7배 늘었다.
 

대아댐(저수지) 풍경 ⓒ 윤찬영

   

대아댐(저수지) 풍경. 새 댐을 세우면서 가둘 수 있는 물의 양은 2.7배로 늘었다. ⓒ 윤찬영

 
옛 댐은 물에 잠겼지만 댐 건설에 맞춰 팠던 물길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댐이 있는 완주 대아저수지에서 시작해 익산을 지나 군산항이 보이는 옥구저수지까지 길게 이어지는 이 물길을 '대간선수로'라고 부른다. 만경강과 나란하게 나 있는 이 물길을 두고 어떤 이는 '제2의 만경강에 다름없다'고 했다. 깊이 1.5m에 넓은 곳은 폭이 15m에 달하니 틀린 말도 아니다. 익산 도심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물길들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대간선수로다.
 

대간선수로의 모습. 지금도 농업용수로 쓰인다. ⓒ 윤찬영

   

대간선수로의 모습 ⓒ 윤찬영

 
억지로 물길을 바꿔야 했던 만경강

일본은 만경강 물길도 바꿨다. 마치 뱀이 기어가듯 제멋대로 굽이쳐 흐르던 물길을 곧게 펴고, 물이 넘치지 않도록 물길을 따라 제방을 쌓아 올렸다. 왜 그랬을까.

190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에선 늘 쌀이 모자랐다. 그러자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들에서 더 많은 쌀을 빼앗아 오기로 하고, 이른바 '산미증산계획'을 세웠다. 1차 산미증산계획(1920~25년)에 따라 전북 지역에 더 많은 농토를 만들어야 했다. 이때만 해도 만경강의 주변엔 황무지가 많았는데, 구불구불한 물길을 곧게 펴고 강물이 넘치지 않게 둑을 쌓으면 어마어마한 땅을 농지로 바꿀 수 있었다. 

어떤 곳에선 폭이 100m나 되는 새로운 물길을 3km에 걸쳐 파기도 했다. 둑을 쌓는 일도 만만치 않았는데, 높이 6~7m에 달하는 높은 둑을 강 양쪽으로 30km씩, 그러니까 모두 60km를 쌓아 올렸다. 하루 200mm의 비가 일주일 동안 쏟아져도 넘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둑의 폭도 7m로, 지금도 차 두 대가 거뜬히 지날 수 있다.

공사는 15년이나 걸려 1939년에야 끝났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1000억 원에 가까운 큰돈이 들어간 그야말로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이 어마어마한 공사에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동원됐다. 1925~35년 사이에만 316만 명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가운데 일본인은 14만 명, 나머지 302만 명은 모두 조선인으로, 대부분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굴착기 같은 중장비들도 쓰이긴 했지만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고선 모두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고 그렇게 퍼낸 흙을 지게로 지고 날랐다. 

잔디를 떠다 입히고, 흙차를 밀어 올리고 그 흙을 부리는 일을 하던 조선인 (남성) 노동자들은 일급으로 70전씩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는 하루 세끼 밥값 45전에 막걸리 한 잔 10전을 치르고 나면 겨우 15전이 남는 돈이었다. 

"동정의 눈물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채석장에서 노동하는 연약한 부녀자들이다. 방금 굴러 떨어질 듯한 석산 밑에서 잔돌을 부시는 것이 일인데 왼손에 돌을 쥐고 바른손엔 쇠망치로 부수노라니 손가락은 터졌다가 아물고 아물었다가 다시 터져 문자 그대로의 완부(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피부)가 없다. 하루 종일 걸려야 반 마차밖에 못 부수니 수입이 겨우 20전 내지 25전이다... 언젠가는 산이 무너져 부녀 세 사람이 분골쇄신하는 대참사도 있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29.5.5.

여전히 비참했던 조선인 농민의 삶

높은 산 중턱에 댐을 쌓아 물을 가두고, 거기서 군산 앞바다까지 긴 물길을 내고, 또 만경강 물길을 곧게 펴고 높다란 둑을 쌓고... 이러한 대공사 끝에 거대 일본인 농장주들은 더 많은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실어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인은, 심지어 조합원이어도 마을을 지나는 대간선수로 물을 자기 논에 마음대로 댈 수 없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조선인 농민들이 물을 쓰지 못하게 막았다. 또 비싼 조합비를 버티지 못해 땅을 뺏기는 일도 흔했다. 그리하여 참다못한 조선 농민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떼로 몰려가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갑문을 부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들이 겪어야 했던 설움과 아픔은 소설 <1938년 춘포>에 잘 담겨 있다.

"상답(上畓) 아래 수문을 쪼매만 열어달란 말 아닌갑네. 상답은 물을 웬만치 먹었응게, 인자 하답으로도 물을 보내야 허지 않겄소."
소작인들은 애가 달았다. 지금도 뜨거운 햇볕에 목을 축이지 못하고 말라 들어가고 있을 논을 생각하면 침 삼키는 것도 아까웠다.
"어제도 물을 내려보내지 않았소."
"내려보내믄 뭣 혀. 수문을 꽁꽁 닫아놓고 밑으로 좔조라 흘려뿌리더구만."
춘포에서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 군산 옥구평야에 이르러 거대한 일본인 농장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도 물 때문에 성화였기 때문에 조합에서 물단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중략...)
"거 참, 답답허구만. 뻔히 눈에 보이는 물을 보고도 내비둬야 한다는 것이 될 일인가?"

 

춘포도정공장의 지금 모습 100년이나 된 건물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있다. ⓒ 윤찬영

 
지난번 글에도 썼지만 만경강 주변 춘포 농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농장주 호소카와는 1914년 2000㎡ 땅에 도정공장을 세우고 정미기를 12대나 들여왔는데, 가을이면 완주와 김제에서 실려 온 쌀들이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100년도 넘은 이 도정공장은 지금은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 옛날 정미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자리를 지금은 멋진 예술작품들이 채우고 있다.
 

도정공장은 최근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 윤찬영

   

춘포 도정공장의 모습 ⓒ 윤찬영

 
다시, 김훈의 <자전거여행>이다.

"만경강은 아직도 파행하는 자유의 강이다. 큰 댐이 없고, 하구언(둑)이 없고, 시멘트 제방이 없고, 강변도로가 없고, 수중보가 없고, 강가에 갈비 먹는 집이 없어서, 마음대로 굽이치는 유역은 언제나 넓게 젖어 있다.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물러간 저녁 무렵의 하구에서, 강의 크나큰 자유는 아득한 갯벌 위에서 헐겁고 쓸쓸했다."

조금 보태자면, '만경강은 익산이라는 도시를 무척이나 닮아있다.' 그리하여, 만경강과 물길을 들여다보면, 익산이 보인다.

[참고한 글]
이종진,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2015)
신귀백, '익산근대농업의 상징, 대간선수로와 이리농림'. <(익산학연구총서①) [익산학 시민교재] 익산, 도시와 사람>(2019), 익산문화관광재단.
윤춘호, <봉인된 역사 - 대장촌의 일본인 지주와 조선 농민>(2017),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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