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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 진정한 내선일체를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을 통해 혈족으로 똘똘 뭉쳐야 했다고 주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지야마 다카모리’(한국명 : 최지환 崔志煥).

그는 조선인 최지환으로 태어났지만 진정한 일본인이 되고 싶어 ‘후지산’(富士山)과 정한론을 제기했던 일본 정치인 사이고(西鄕)다카모리(隆盛)중 다카모리를 따와 ‘후지야마 다카모리(富士山 隆盛)로 이름을 바꿨다.[기자말]
그래픽(=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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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된 읍청루 전경 (사진=김남균 기자)
 영동군 향토유적 제27호로 지정된 읍청루 전경 (사진=김남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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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군수 정영철, 국민의힘)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돈을 내고 친일반민족행위자 군수가 만든 정자를 향토유적으로 지정한 것도 모자로 친일군수를 추모하는 내용은 담은 '연혁기'를 40년 이상 방치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을 일으키는 정자는 영동읍 매천리 산 5-10번지에 소재한 영동군향토유적 제27호인 읍청루다. 기둥과 바닥은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고, 지붕은 목재로 되어있다.

영동군청 홈페이지에 게시된 설명자료에 따르면 읍청루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5년 당시 조선총독부 군수였던 최지환(창씨명 '후지야마 다카모리)이 만들었다. 건립비용은 손재하란 인물이 마련했다. 두 인물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이후 1971년 임혁재 영동군수가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시기는 1996년이다.

현재 읍청루에는 읍청루 연혁기(沿革記)와 후지야마 다카모리(한국명 최지환)가 정자를 지을 때 쓴 기문(記文)등 3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읍청루 내부에는 후지야마 다카모리가 쓴 기문을 복원한 편액 등 총 3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읍청루 내부에는 후지야마 다카모리가 쓴 기문을 복원한 편액 등 총 3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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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청루 내부에 걸려 있는 연힉기 편액
 읍청루 내부에 걸려 있는 연힉기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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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작성된 읍청루 연혁기는 가관이다. 연혁기에는 연혁기에는 "현 위치로 옮길 적에 누구의 소치인지 읍청루라는 大字懸板(대자현판)을 비롯하여 亭內(정내)에 있었던 최지환 군수 기문을 판각(板刻)하여 걸었으나 그 行方(행방)을 감추어 찾을 길이 없어 어찌 주민으로서 면괴스럽지 않으리요"라고 적혀있다.

이어 "地方(지방)의 수치심을 금(禁)치 못하던 중 영동군수 우용제 씨, 영동읍장 배정혁씨와 동원(東園) 임한영씨의 쾌찬(快贊)으로 재제(再製) 현판(懸板)하니 그 뜻을 찬양하며 감사함을 금(禁)치 못하는 바이다"고 씌여있다.

마지막에는 "다행히 최지환 군수 기문은 전해져 있음으로 아래에 기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고 적었다.

정리하면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지야마 다카모리'가 쓴 현판과 기문을 잃어버려 주민으로서 자괴감을 느꼈는데 다행히도 친일파 군수가 쓴 기문은 전해져 그 내용을 다시 서 후세에 전한다는 것이다.

본보 보도 통해 문제점 지적했지만 영동군은 묵묵부답

본보는 2020년 12월 24일 "영동읍청루! 기생까지 동원해 친일한 악질경찰 최지환을 추모"라는 기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영동군 관계자에게 '후지야마 다카모리'를 추모하는 듯한 연혁기 등을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는 것도 전달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영동군은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주지 않고 있다. 결국 친일파 군수를 추모하는 내용이 담긴 연혁기와 기문이 40여 년간 계속 방치된 셈이다.

최지환은 어떤 인물? 진정한 일본인이 되고 싶은 뼛속까지 친일파

후지야마 다카모리는 대한제국의 일개 순사에서 시작해 영동‧충주군수,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친일파의 거두다.

1949년 반민특위는 그의 혐의에 대해 "(경상남도) 진주에서 과거 한일합방시 진영대 대장 경〇〇 중위를 기생으로서 매수하여 무기고의 열쇠를 훔쳐서 이를 일본인에게 바쳐 의분에 넘친 이 나라 민족이 봉기하려는 것을 미연에 방지케 한 후 더욱 일본의 충신이 되어 중추원 참의까지 지냈다"고 밝혔다.

후지야마 다카모리는 반민특위가 언급한 위 사건으로 출세의 길이 환하게 열린다. 1917년 7월에는 조선인 경찰관이 오를수 있는 최고 직급인 경시에 오른다. 1919년 평안남도 경찰부에서 경시로 근무하면서 3‧1운동을 진압한 대가로 충청북도 경찰 보안과장으로 승진한다. 이후에 음성군수, 영동군수, 충주군수를 거쳐 평안남도 참여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그의 친일반민족 행위도 화려하다.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작성한 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후지야마 다카모리는 전 조선인이 국어(=일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진정한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결혼을 통해 혈족으로 뭉처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면 단위별로 일본 신당을 설치해 경신숭조 사상으로 정신개조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일제가 미국과 전쟁을 벌이며 조선인에 대해 강제징집을 하는 징병제를 시작하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후지야마 다카모리는 "조선인에게 1943년부터 징병제가 실시된다는 것을 듣고 오로지 감격스러울 따름"이라며 "(조선) 반도인이 진정한 일본인이 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부산일보에 기고했다.

그는 이 글에서 "다행히 아들을 잔뜩 낳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전부 이 제도 실시의 영광을 받도록 하고 싶다. 나도 젊기만 했다면..."이라고 적었다. 

일본 군인으로 보내고 싶다던 아들, 대한민국 장관이 됐다.

후지야마 다카모리가 징병제를 통해 일본군대로 보내고 싶었던 아들 중 하나가 최형섭(崔亨燮, 1920~2004)이다.

후지야마 다카모리는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9년 아들 최형섭을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보냈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1969년 서울 동대문구 홍릉 KIST본관앞에서 찍은 사진. 최형섭 전 장광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후지야마 다카모리(한국명  최지환)의 아들이다.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1969년 서울 동대문구 홍릉 KIST본관앞에서 찍은 사진. 최형섭 전 장광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후지야마 다카모리(한국명  최지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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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최형섭은 1966년 카이스트(KIST)의 초대원장이 된다. 박정희 정권시절인 1971년 과학기술처장관에 발탁돼 무려 7년 7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한국과학원 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등을 역임했다.

2004년 사망한 최형섭은 대한민국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김남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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