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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기는 책을 읽는 재미가 있다. 자전거여행기는 일종의 체험기와 같아서, 책을 읽다 보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기승전결이 있고, 적절한 순간에 위기와 절정이 나타나는 그런 드라마 말이다. 그래서 새로운 자전거여행기가 나오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여행기는 드라마를 이렇게 만들려고 해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토록 우아한 제로웨이스트 여행>도 그런 자전거여행기 중에 하나다. 이 여행기가 보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때로는 그 사람의 가슴을 바짝 졸아들게 만든다. 그 느낌이 마치 모험으로 가득 차 있는 로드 무비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미리 짜인 극본에 맞춰 제작되는 드라마가 아니라서 극 전개상 구성이 매끄럽지 않은 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런 점이 또 현실감을 더해줘, 오히려 더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자전거여행기에서는 다른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억지로 꾸며낸 듯한, 작위적인 장면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이토톡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 표지.
 <이토톡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 표지.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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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빛나는 조연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신혜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한국인이다. 어느 정도로 평범하냐면, 그는 초등학교 때 이후로 자전거를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자전거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가 자전거를 택한 건, 단지 자전거가 걷는 것보다 더 빠르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작가 신혜정도 별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있다면, 그냥 "눕는 게 취미"다.

그러니까, 그는 평소 자전거로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는 지독히 평범한 사람에 속한다. 장거리 자전거여행에 나서는 사람들은 대개 자전거를 탄 이력이 많고, 상대적으로 강한 체력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작가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여행을 감행한다니, 뭔가 잘못됐다 싶을 수도 있다.

여행 계획도 지극히 간단하다. 사실 계획이라는 게 별거 없다. 이스탄불을 목적지로 해서, 유라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중간에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지점 3곳을 정한다. 나머지 경로는 유동적이다. 그 외 여행 중 지켜야 할 규칙 내지는 조건 몇 가지를 덧붙인다. 하지만 그 규칙과 조건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 여행 중에 다양한 변수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 여행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걱정 따윈 일단 접어두자. 자전거여행에는 어느 정도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도로 위에서 자동차들과 함께 달리거나, 한적한 길 위에서 낯선 사람과 조우할 때 특히 긴장감이 높아진다. 애초 모험을 감수할 각오와 용기가 서 있지 않으면 여행을 떠날 수 없다. 작가 역시 그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다.

주인공만 평범한 게 아니다.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조연들은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그들 역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하등 별다를 게 없는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 조연들이 모두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빼고 나면,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점을 빼고 나면, 특별히 다르다고 할 만한 게 거의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자전거를 타고 온 신혜정을 만나 만들어내는 일화들이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작가에게 손을 내민다.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 일화들이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여행 지도. 검은 선이 작가가 여행한 경로. 검은 선이 유라시아를 지나 시베리아로 이어진 것은 작가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흑해에서 배를 타고 우크라이나를 지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기 때문이다.
 여행 지도. 검은 선이 작가가 여행한 경로. 검은 선이 유라시아를 지나 시베리아로 이어진 것은 작가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흑해에서 배를 타고 우크라이나를 지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기 때문이다.
ⓒ 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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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웨이스트'로 가는 길

작가는 중국을 지나 튀르키예까지, 유라시아 지역을 1년 반 동안 떠돈다. 작가가 여행 중에 돌아본 나라들은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얀마, 인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튀르키예 등이다. 이들 국가명을 대는 것만으로도 이 여행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산악 지역에서는 언덕 하나가 길게는 수십km에 달한다.

그럴 때,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 노숙을 하지 않으려면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상황에 따라 버스나 기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긴 언덕을 지나가야 할 때는 과감하게 트럭을 얻어 타기도 한다. 그렇게 했는데도, 여행 중에 자전거로 달린 거리만 1만 2500km에 달한다. 대장정이다.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여행이 아니다. <이토록 우아한 제로웨이스트 여행>는 다른 자전거여행기와는 약간 다르다.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이 여행은 여행 중에 어디를 가든 처음부터 끝까지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회용 플라스틱이 없는 여행'을 목표로 하다 보니, 여행 준비물에도 반찬통과 지퍼백, 물통 3종과 장바구니 3종, 수저, 면생리대 등이 포함된다. 작가는 이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며, 여행 내내 플라스틱과 비닐 따위를 쓰레기로 만들지 않으려고 애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반찬통과 천 주머니를 들이밀며 비닐봉지를 거절하는 일을 반복한다.

작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수시로 그 지역의 쓰레기 재활용장을 찾아다닌다. 여행을 하다 말고, 길에서 만나는 지역 주민들을 붙잡고는 근처에 쓰레기 재활용장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이런 외국인 여행자,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작가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별로 없다. 작가에게 갈 길을 알려주고, 그것도 모자라 직접 안내를 자청하는 사람도 있다.

여행 기간이 일 년쯤 지났을 무렵에는 작가가 소지한 텀블러가 "반쯤 허물을 벗"는 지경에 이른다. 화덕빵이나 쿠키 등을 담던 천 주머니는 음식 찌꺼기가 묻어 지저분해진다. 한 번은 그 주머니를 들고 샌드위치를 사러 갔다가 퇴짜를 맞는다. 현지 상인이 그 주머니를 보고는 "더러워서" 안 된다며, 작가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기어코 은색 포장지에 샌드위치를 싸준다.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 책 내용 일부. 여행 준비물(사진 왼쪽)과 태국의 쓰레기 재활용장 풍경(사진 오른쪽).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 책 내용 일부. 여행 준비물(사진 왼쪽)과 태국의 쓰레기 재활용장 풍경(사진 오른쪽).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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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의 시작과 끝

'나 홀로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장거리 세계 여행'에 '제로 웨이스트'를 겸하는 건, '극단적인 모험'에 '실현 불가능한 도전'을 더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이 여행이 어떤 결과에 다다를지 궁금하다. '이 여행,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제로 웨이스트가 여행 중에 어떤 이야기를 이어갈지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처음에 여행은 호기롭게 시작한다. 제로 웨이스트를 가미한 자전거여행도 여행이니까, 작가도 다른 여행자들과 다름없이 살짝 긴장도 되고, 한편으론 여행을 앞둔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들떴을 것도 같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마음이 앞서 허둥지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태평해도 너무 태평하다.

여행을 떠나는 날부터 예기치 않은 변수가 나타난다. 인천으로 중국행 배를 타러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배를 놓칠 뻔 한다. 선박회사로부터 잘못하면 "오늘 (배를) 못 탈 수도 있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비하면, 상당히 우아하게 종결을 지은 편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여행을 꿈꾼다. 자전거여행은 사실 사람들이 꿈꾸는 색다른 여행 중에 하나다. 하지만 그걸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차일피일 결정을 미룬다. 결국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자전거여행은 꿈으로 남는다.

자전거 세계여행은 더욱더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 여행이 사람들을 상당히 험한 길로 이끈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하다. 험한 길을 앞에 두고 강한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진보'가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신혜정은 앞서간, 용감한 사람이다. 덕분에, 우리가 여기 가만히 앉아서 일 년 넘게 지속된 자전거여행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작가는 2018년 5월에 서울을 떠난다. 그리고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 3월에 국경이 잇달아 폐쇄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온다. 작가는 여행을 다녀온 후 "대학을 졸업하며 다시는 공부하지 않겠다"던 마음을 접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시민단체에서 기후 대응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 - 1년 반, 12,500km, 유라시아 자전거 유람기

신혜정 (지은이), 사우(2023)


태그:#자전거여행, #유라시아, #제로웨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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