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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문연구원 동고송이 주관하고 광주광역시 광산구가 주최하는 광산아카데미 강연장엔 오늘도 많은 시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지난 5월에는 이창동 감독이 담담하게 젊은 날의 고뇌를 이야기했는데, 이번 6월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정지아 작가의 이름은 어머니가 빨치산으로 뛰었던 '지'리산과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뛰었던 백'아'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빨치산은 무거운 이름이자 비극의 명사인지라, 과연 '빨치산의 딸' 정지아의 이야기를 들으러 시민들이 올까 걱정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지난 20일 광산문화회관에는 3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곳저곳에 중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작가는 청바지 차림의 옷을 입고 구성진 일화를 곁들이며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했다.

감옥에 있는 아버지 원망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정지아 작가의 강연 모습
 정지아 작가의 강연 모습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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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제가 구례에서 (이름을) 날렸어요. 공부도 잘했고, 글짓기도 잘했고요, 반공웅변대회에도 나가 상을 독차지했어요. 어느 날 친구하고 말싸움을 했는데, 친구가 나를 향해 '빨갱이 딸 주제에'라고 하는 거예요. 어른들은 나를 보고 늘 그랬어요. '공부는 잘하는데, 쯧쯧쯧.' 알고 보니 구례의 모든 어른들이 빨갱이의 딸인 저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냈던 겁니다. 

저는 구례가 싫었습니다. 익명의 도시로 떠나 살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올라갈 형편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조르고 졸라 마침내 서울 시민이 됐습니다. 그런데 '빨갱이 딸'의 낙인은 지워지질 않는 거예요. 경찰은 우리를 감시했고, 집주인이 알게 되면 그날로 셋방에서 쫓겨났고, 학교에서도 선생들은 나의 정체를 알았고."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박헌영의 아들로 태어난 원경 스님이 초등학교도 가지 못하고 산속에서 살았듯이, 지금은 경쾌하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정지아 작가 역시 본인은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부모 때문에 죄인의 굴레를 감내해야 했다.

중학교에 들어와 엄마도 빨치산이었음을 알게 됐다. 연좌제 때문에 공직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세상이 싫었다. 그렇다고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순천으로 전학을 왔고, 순천에서 구례까지 통학하면서 여고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고서야 비로소 부모의 젊은 시절을 이해하게 됐고, 이후로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는 사뭇 달랐다. 소설에서 딸은 아버지를 시대착오적 인물로 묘사했지만, 강연에서 술회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동네의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여해 궂은일을 혼자 도맡는 분이었다. 우체부 아저씨가 오면 엄마가 정성껏 말려놓은 곶감을 퍼주는 인정 많은 분이었다. 동네 아이들을 사랑했고, 특히 코를 줄줄 흘리는 아이들을 예뻐했다. 코를 줄줄 흘린다는 것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임을 의미한다.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 정운창은 잘 생기고 똑똑한 아이보다 못생기고 더러운 아이들을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정지아 작가가 구례로 낙향한 까닭

그랬다. 정운창은 젊은 날, 역전의 용사였다. 여순 항쟁 때 입산해 활약한 '구빨치'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곡성군당은 고질적 내분으로 복잡했는데, 정운창은 곡성군당 위원장을 맡아 군당을 정돈했다. 그는 솔선수범의 표본이었다. 1950년 가을, 다가오는 겨울의 식량 비축을 위해 곡성의 봉두산 골짜기에 식량을 비축했고, 이 일을 책임지고 수행한 분이 정운창이었다.

"이현상 부대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한 어머니가 곡성군당 위원장으로 활동한 아버지보다 지위가 높던데, 어떠셨어요?"

강연장에 들어가기 전, 차담회 시간 때 나는 작가에게 슬쩍 물었다. 

"아버지도 깐깐한 분이었으나, 엄마한테 자주 비판을 받았죠."
"정치위원이라면 사단장급 간부가 아닙니까?"
"엄마는 자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한을 품었어요."
"서로 다투지는 않았나요?"
"두 분이 이불을 둘러쓰고 밤새 옛이야기를 두런두런 주고받을 때가 두 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나는 정지아 작가가 구례로 귀농한 분인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본시 서울 생활을 하던 도시 여성이었는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에 낙향한 것이다. 2~3년 모시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웬걸, 어머니의 흰머리에 검은 머리가 자라기 시작하고, 어머니의 눈이 밝아지더라는 것. 정지아는 영영 구례 촌사람이 됐다. 형제가 많으면 부모 봉양을 서로 미루면서 싸움을 하는데, 정지아는 다툴 형제가 없다. 함께 살면서 외로움을 달래는 고양이 두 마리, '그냥이'와 '저냥이'가 있을 뿐이란다.

강연이 끝나고, 사인회가 열렸다. 100여 명이 줄을 지었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 작가였다니, 나는 놀랐다. 한 분 한 분 정성껏 사인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정지아 작가 사인회를 마치고
 정지아 작가 사인회를 마치고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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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중산리에 있는 빨치산 토벌 전시관

6월 22일은 지리산에 가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서둘렀다. 광주에서 남원을 경유하여 함양을 지났다. 아침부터 내리는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산청에 들어서니 천왕봉 아랫도리에 운무가 자욱했다. 이곳이 1951년 여름 이현상부대가 최초의 전투를 벌인 곳이다. 빨치산 기념관은 중산리에 있었다. 중산리는 산청에서도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신령한 산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가 보니 정식 이름은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었다. 

1층엔 해방 정국에서 빨치산이 형성되는 역사를 전시했고, 2층엔 빨치산의 생활을 전시했다. 그들이 사용하던 총이며, 식기며, 숟가락이며, 옷이며, 텐트 등이 전시돼 있었다. 빨치산이 은거한 아지트는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했는데, 이곳에서 매우 다양한 아지트를 볼 수 있었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의 사진들
 빨치산 토벌 전시관의 사진들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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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를 벗어나 차는 의신 마을을 찾아 나섰다. 하동을 거쳐,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의신이 나온다. 우리는 계곡 깊숙한 곳으로 차를 몰았다. 조금만 더 가면 그곳에 이현상의 아지트가 있고, 이현상 선생이 죽은 빗점골이 있는데 차로는 더 다가설 수 없었다. 마을로 돌아와 '지리산 기념관'을 찾았다.

휴전협정은 빨치산에게 죽음이었다. 인민군이 유엔군과의 전쟁을 그만두는 시점에서 남한의 빨치산은 오갈 데가 없었다. 김일성은 휴전협정 과정에서 빨치산에 대해 침묵했다. 

'빨치산'은 나에게 불덩어리다. '빨치산'만 생각하면 가슴에 분노의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인간의 역사에서 한국의 빨치산만큼 비극적인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들은 생쌀을 씹으며 토벌대에 쫓겼다. 눈 위에 생솔가지를 꺾어 잠을 잤다. 동계 토벌작전이 개시되면, 열흘을 굶으면서 지리산 골짜기를 헤맸다. 비행기로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이태 작가의 <남부군>을 보면 토벌대에 쫓겨 다니다 피로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얼어 죽은 빨치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잔혹할 수가 있을까?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인내의 극한을 견뎠던 분들, 그렇게 고결한 삶을 산 분들이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외롭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지리산에 묻힌 1만여 빨치산의 명예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6.25 한국전쟁 이후 74년이 흘렀다. 휴전협정을 맺은 지도 71년이 지났다. 얼마의 세월이 더 흘러야 하나? 토벌대 경찰들도 우리 형제요, 빨치산도 우리 형제다. 지리산에서 유명을 달리한 분들의 합동위령제라도 치러드려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황광우 인문연구원 동고송 상임이사입니다.


태그:#역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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