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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농성장 주변을 거닐던 너구리.
▲ 너구리와 눈 맞추다 천막농성장 주변을 거닐던 너구리.
ⓒ 이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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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야, 너구리!"

세종보 천막농성장 위 '재난안전본부'에서 금강을 바라본다. 비를 피해 잠시 하천부지에서 나와 안전한 둔치에 텐트를 쳤는데, 이곳에서 한나절 바라보니 진짜 많은 야생동물들이 우리 천막농성장 주변에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오리 가족도, 너구리도, 딱새도, 참새도 비설거지를 하는지 분주하다. 천막지붕에 참새가 앉아있고, 너구리도, 꿩도 천막 옆을 태연하게 지나간다. 이제는 정말 '이웃'으로 우리를 받아들였구나.

지난 6월 3일, '슬기로운 천막생활' 행사를 할 때 수달 한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며 우리를 바라보던 그 때가 떠올랐다. 그 순간의 느낌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수달이 도망가거나 경계하지 않고 유유히 헤엄치며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이 말이다. 마치 친구가 지나가면서 '안녕, 너희들 뭐하고 있냐' 하고 묻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들의 지척에서 수많은 뭇생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자각.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이런 경험의 유무에 있지 않을까. 실제 강과 산에서 보고, 듣고, 관찰하는 경험의 차이다. 우리 눈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있을 생명들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바로 자연보호이고 생태보전이다.

농성장 곁 다양한 이웃들… 모두 강의 이웃들이다
 
물총새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쉬고 있다.
▲ 바위 위 물총새 물총새 한 마리가 바위 위에서 쉬고 있다.
ⓒ 이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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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댐 방류량이 늘었다 줄었다 하면서, 늘었을 때 생긴 물웅덩이에 갇힌 물살이들이 방류량을 줄이면서 그 자리에서 말라죽게 된다. 대부분이 새끼손톱만한 어린 물살이들이다. 물이 빠진 바닥이 이들의 사체로 즐비했다. 사람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되는 생명들이 죽는 것이 안타깝다. 다행히 비가 와서 죽음을 코앞에 뒀던 물살이들이 살아났다. 

오리가족이 산책하고 얕은 물가로 귀가하는 모습, 물총새가 바위 위에 앉아 쉬는 모습, 너구리 한 마리가 느긋하게 수풀을 거닐다가 우리를 쳐다보기도 한다. 강변에서만 놀던 물떼새들은 천막농성장 주변을 놀이터 삼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딱새 유조도 발견했다. 새들의 천국, 동물들의 놀이터가 따로 없다.

그런데 농성장 바로 위쪽에서 그라운드 골프를 치는 한 어르신이 재난안전본부 앞으로 와서 "보기 싫다" "이웃사촌 생각 좀 해달라"고 싫은 내색을 했다. 재난안전본부 그늘막이 골프장 쪽으로 살짝 넘어간 것을 탓한 것이다. 섭섭했고 말문이 막혔다. 다음에도 또 그런 말을 하면 "녹조 독도 없고, 악취도 없는 강가에서 운동하실 수 있도록 세종보 재가동 막아낼테니, 조금만 더 참아주시라"고 말씀드리려 한다. 우리는 모두 강의 이웃이니까.

새벽의 청년과 저녁의 중년… 전수되는 강
 
비가 내리고 잠시 개인 하늘
▲ 비가 한바탕 내린 금강 비가 내리고 잠시 개인 하늘
ⓒ 대전충남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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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을 지키고 있으면 금강변을 찾아오는 건 야생동물뿐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2일, 새벽 6시에 건강한 청년이 방문했다. 혼자 돌멩이를 던지고, 물도 만진다. 풀숲에도 들어갔다. 그에게 다가가 "어쩐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새벽에 운동하고 뭐 할 것 없나하고 강을 찾아왔다"고 답했다. 아마도 유년시절, 강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청년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저녁에는 전북 정읍에 사는 중년의 시민이 뉴스를 보고 찾아왔다. 고향이 만경강 지류 원평천인데 예전에 거기서 조금 나가면 갯벌이 백합밭이었다고 추억하듯 말했다. "망초꽃이 필 때면 반딧불이가 날아다니고, 강에서 노느라 등껍질이 두 번은 벗겨져야 여름을 지났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지금은 사막같아 재미가 없다"면서 "강을 뭐하러 다 막아놓느냐"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의 청년과 저녁의 중년 사이에는 추억의 강이 흐르고 있다. 시멘트로 채운 도심의 하천에서는 추억할 수 없는 강이다. 이들이 금강변을 찾아온 것은 이 때문이다. 2018년부터 세종보의 수문을 활짝 열어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금강이 바로 이들이 찾아가고자했던 추억의 강이었다. 사람들이 이렇듯 추억을 되씹는 까닭은 위로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거세게 흐르는 강은 야생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무한한 선물이다.
 
불어난 물살에 잠시 몸을 피하고 있는 오리가족들
▲ 비를 잠시 피해있는 오리가족들 불어난 물살에 잠시 몸을 피하고 있는 오리가족들
ⓒ 대전충남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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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지난 흑백사진처럼 금강변에 잠시 멈춰섰던 두 사람을 되짚으며 떠오른 싯구도 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백무산 '정지의 힘' 중)

빠르게 질주하는 현대인들 사이에서 멈춘다는 건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잠시라도 멈춰서면 한참은 뒤쳐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들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멈춰서야 반추할 수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정지해야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악취가 풍기고 녹조가 새까맣게 피는 강에서 우리는 멈춰설 수 있을까?

일부 정치인들은 돈이 아까워서, 수천억원을 투입해 만든 세종보를 무조건 재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논쟁은 이미 끝이 났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비용대비 편익 분석 결과, 세종보를 해체하는 게 세종보로 금강을 틀어막는 것보다 3배 이상의 돈을 아낄 수 있다는 과학적이고 산술적인 평가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또 금강변에 멈춰서서 위로를 받는 삶을 돈의 가치로 헤아릴 수 있을까. 
 
비를 한차례 또 잘 보내고 밤을 맞았다
▲ 비 온 뒤 천막농성장 비를 한차례 또 잘 보내고 밤을 맞았다
ⓒ 대전충남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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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금까지 농성장을 찾아온 2천 여명의 활동가와 시민들이 함께 버티고 있는 것이다. 30여년 전으로 물 정책을 회귀시켜 자신들의 주머니만 불리려는 토건족들에 맞서서 우리는 함께 어깨 걸고 멈춰서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야생생물뿐만 아니라 우리 미래세대들에게도 추억의 씨앗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흐르는 강의 '희망 씨앗'을 만들고 있다.

태그:#금강, #낙동강, #영산강, #세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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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가, 글쓰는 사람. 남편 포함 아들 셋 키우느라 목소리가 매우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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