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17 11:54최종 업데이트 24.06.18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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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배산에서 내려다 본 도심 풍경. 중앙에서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호남선 철길이 보인다. ⓒ 윤찬영


전북 익산은 철길 위에 세운 도시다. 은유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정말로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철길이 놓이고 기차역이 생기면서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익산을 처음으로 지난 철길은 '호남선'이었다. 1899년 9월 경성(노량진)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 놓이고, 다시 몇 년 뒤인 1905년엔 경성(영등포)과 부산(초량)을 잇는 경부선이 놓인 뒤였다. 교통수단이라고 해봐야 말이나 소가 끄는 달구지와 돛단배가 전부이던 시절이었으니 기차가 가져온 변화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철길 위에 세운 도시, 이리
 

1912년에 세운 이리역사 모습 ⓒ 이리시

 

1929년에 지어져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때까지 쓰인 이리역사 ⓒ 익산시

   
물길과 옛 시장을 따라 흐르던 모든 것들이 이제 철길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옛 이리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새로운 길이 생기고 건물들이 올라갔다. 근대 신시가지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시가 빠르게 몸집을 키워갔다. 먼저 기차역 동쪽(중앙동)에 새로운 시가지가 생겼고, 예로부터 오일장이 섰던 솜리마을 주변(인화동)으로 시장도 빠르게 커졌다. 금강이라는 커다란 물길의 길목에서 오랫동안 관문 역할을 해온 강경과 일찍이 12목 가운데 하나로 전라도의 수도 역할을 하던 전주는 거꾸로 힘을 잃어갔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넘어온 일본인들도 철도역 주변으로 뿌리를 내렸다. 1910년 무렵 겨우 십여 명 남짓이었던 이곳의 일본인 수는 철길이 놓인 1912년, 1000여 명으로 늘었다. 3년이 지난 1915년엔 다시 1893명(550호)으로 늘어 348명(82호)이던 조선인보다 몇 곱절이나 많아졌다.


역 동쪽으로 철길과 나란히 이어진 가장 번화한 거리를 '영정통'(중앙로1길)이라 불렀다. 1914년에 이리좌라는 극장이 들어섰고, 뒤이어 이리구락부, 호남구락부, 철도구락부 등의 오락시설들이 잇따라 자리를 잡았다. 이리좌가 영정통의 시작이었다면, 그 반대쪽 끝엔 삼남극장이 있었다.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 때 천장이 주저앉는 바람에 가수 하춘화씨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주일씨가 크게 다쳤다던 바로 그 극장이다.

영정통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익산군청과 이리읍사무소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삼남은행 등의 업무시설이 들어섰고, 자연스럽게 여관과 식당, 술집들이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 지주와 상인, 기업가들이 몰려들면서 일본인 신시가지가 만들어졌다. 안타깝게도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생활권 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일제강점기 영정통 풍경 ⓒ 익산시

 
원도연 원광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 교수는 "이리역의 등장과 함께 호남의 근대가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옛 이리가 교통 거점을 넘어 '근대 문명의 관문'이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리역 앞의 창인동, 중앙동 일대는 호남에서 가장 번성한 상업구역이었다. 이리를 중심으로 발전한 대농장의 지주와 농업기술자, 그들을 찾아 들고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물고 소비하면서 근대적인 풍물을 발전시켰다."

신귀백 익산근대문화연구소 소장은 옛 영정통이 1970-80년대까지 번성했다고 말한다. 여러 행정기관과 금융기관, 금은방과 식당 등이 모여있어 "한 마디로 호남북부권역의 원스톱 서비스 공간"이었다는 것. 

"중앙동은 호남의 명동이었다. 시민들은 중앙동 금은방에서 결혼예물을 마련하고, 100여 개가 넘는 양장점에서 옷을 맞췄다. 전흥라사에서 옷감을 떼어 모니카 양장점, 남성테라에서 옷을 맞추고, 신한당과 중앙사에서 패물을 구입하면서 달나라 혹은 영빈예식장에서 음식을 나누며 새로운 삶을 축하해 주었다." 

여러 길이 만났다 흩어지는 도시

호남선이 개통하던 1912년 3월 6일, 익산-군산을 잇는 군산선도 함께 개통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넓은 호남평야를 등지고 있어 일찍이 개항의 운명을 맞은 군산항이 개항한 지 13년 만이었다. 군산선은 겨우 24.7km의 짧은 철길이었지만,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어머어마한 쌀들이 이 길을 따라 군산항으로 실려온 뒤 곧바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모조리 건너갔다.
 
이듬해 봄까지 군산항에는 반출되는 쌀가마니가 높게 쌓여 있었다. 바닷물이 하루 두 번씩 들어와서 4개의 부교(浮橋)가 둥실 떠오르면 거대한 수송선이 정박을 했다. 그리고 시커먼 화물열차가 천천히 들어와서 지네가 알을 낳듯이 꾸역꾸역 쌀을 내려놓았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은 대장정미소와 같은 곳에서 도정을 해서 가져오는 것도 있었고, 도정이 안 된 나락채로 가져오는 것도 있었다. 부두에서 트여 있는 곳은 철길뿐이었다. 철길 양쪽으로 건물을 세워놓은 것처럼 쌀가마니들이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 박이선 <1938년 춘포> 중

이 도시를 다룬 시나 소설엔 역과 철길 이야기가 빠지는 법이 없다. 흑백사진 몇 장으론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그 시절의 풍경에 다가가는 길로 이러한 글만 한 게 없다.

호남선이 놓이고 얼마 뒤인 1914년 11월, 이번엔 전라선이 이 도시를 지나게 된다.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전주, 임실, 남원을 거쳐 여수에 이르는, 호남 내륙을 남북으로 가르는 185.2km에 달하는 긴 철길이다. 오전 7시 30분에 옛 이리역을 떠난 기차는 7시간 40여 분 뒤인 오후 3시 11분에 여수항에 도착했고, 여수항에서 오후 4시 30분에 떠나는 여관(여수-시모노세키) 연락선을 타면 다음 날 오전 8시에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닿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리역 앞 풍경 ⓒ 익산시

 
전라선은 전주-익산을 잇는 전북경편철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일본인이 세운 동산농사주식회사가 전주 일대에서 생산한 쌀을 실어나르려고 만든 철도다. 만경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지대인 익산 춘포(옛 대장촌)와 완주(삼례)를 지나는 철길이었다. 지금 익산역에서 동쪽으로 8km쯤 떨어져 있는 춘포역은 1997년부터 역장이 없는 간이역으로 운영되다가 2011년 5월 13일 문을 닫았다. 100년에 딱 3년이 모자란 97년 만이었다. 춘포역사는 지금 남아있는 역사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등록문화재 210호)다.

마지막으로 장항선도 이 도시를 지난다. 장항선은 충남 천안과 금강 하구의 장항을 잇는 철길로, 1922년 6월 천안-온양온천을 잇는 충남선으로 시작했다. 지금도 서해안을 따라 새마을호와 무궁화호가 천안에서 익산 사이를 오간다.
 
이리시를 벗어나기 전 철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오른쪽으로 갈라진 기찻길은 육십 리 평야를 달려 서해 바닷가 군산으로 이어졌다. 왼쪽으로 갈라진 기찻길은 전주를 지나면 금세 산속으로 뻗어 웅장한 지리산을 곁눈질로 보며 맑은 남해 바다 여수까지 이어졌다. 이 목사가 탄 기차는 가운데 길인 지평선이 보이는 호남평야를 지나 무등산 아래 광주로 들어가게 될 터였다. - 김남중, <기찻길 옆 동네> 중

철길 위 새겨진 상처 딛고 일어선 도시, 익산

철길 위에 새겨진 깊디깊은 상처들도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11일, 미군 B-29 폭격기 두 대가 옛 이리역과 만경강 철교에 폭탄을 떨어뜨려 수백 명이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긴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 사건은 무려 50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1년 익산시의회가 '이리역 오폭사건 진상조사단'을 꾸려 정부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와 함께 진상조사를 벌이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0년 만인 2010년 6월 29일 '미군의 오폭으로 벌어진 피해'로 결론 내렸다(고의성 여부는 끝내 밝히지 못했다). 사건이 벌어진 지 무려 60년 만이었다.
 
양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우물가를 떠날 즈음, 일단 북쪽으로 날아갔던 폭격기 편대가 어느 틈에 다시 나타났다. 아이들은 또다시 소리소리 목청을 높여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백번 나타나면 백번 모두 그런 식으로 환영할 판이었다. 폭격기 편대는 웬일인지 시내 상공을 무대 삼아 크게 한 바퀴 원을 그리며 율동을 하는 듯싶더니만 느닷없이 파리똥 같은 새까만 점들을 밑으로 좍좍 쏟아내기 시작했다... "폭탄이다, 폭탄!" - 윤흥길 <소라단 가는 길> 중
 

이리역 폭발 사고로 피해를 입은 중앙동 풍경 ⓒ 익산시

  

이리역 폭발 사고로 피해를 입은 중앙동 풍경 ⓒ 익산시

 
1977년 11월 11일 일어난 '이리역 폭발 사고'도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았다. 화물칸에 실려있던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참사로, 모두 59명이 죽고 1402명이 다쳤다. 다음날에야 원인이 밝혀졌는데, 한국화약주식회사 호송원 신무일씨가 어두운 화물칸에서 잠을 자려고 불을 붙여 세워둔 양초가 쓰러지면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을 일으킨 탓이었다.

여기엔 '급행료'라고 하는 그 시절의 부조리가 숨어있다. 화차를 배정하는 직원들이 이른바 '급행료'라는 뒷돈을 요구했고, 돈이 없던 신씨가 하루가 다 지나도록 역에 발이 묶이자 홧김에 역 앞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왔던 것. 이 폭발로 깊이 15미터, 직경 30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웅덩이가 파일 만큼 폭발의 위력은 컸다. 철로들은 엿가락처럼 휘어졌고, 이리시내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꽝!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천지는 암흑에 잠겼다. 뒤이어 꽈과광- 굉음이 연거푸 터졌다. 땅과 하늘이 부르르 떨었다. - 김호경 <삼남극장> 중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고 다음 날 최규하 국무총리, 김치열 내무부, 신형식 건설, 최경록 교통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긴급대책회의를 열고는 곧바로 헬기를 타고 사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군인들을 보내 이재민이 머물 천막촌을 짓고, 폐허가 된 땅에 200일 만에 새 아파트를 올렸다. 사고가 일어나고 겨우 열흘쯤 지나서는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한 달 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천막촌을 찾아 이재민들을 만났다.
 

복구작업에 나선 군인들 ⓒ 익산시

   

이재민들이 머물렀던 천막촌 풍경 ⓒ 익산시

 
익산역 동쪽 광장에서 저 멀리까지 곧게 뻗은 '중앙로'와 원광대학교 쪽으로 이어진 '익산대로'가 이때 새로 나거나 넓어진 길들이다. 사고 이듬해 익산역사도 중앙로가 시작되는 남쪽으로 조금 옮겨 새로 지었다. 지금 익산역 자리다.

급하게 내놓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새이리 건설 계획'이었지만 오랜 세월 고여있던 도시 풍경은 크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역 바로 옆 무허가 판잣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철인동 집창촌이 폭발로 무너지면서 재개발에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리역 폭발 사고를 바라보는 익산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은 복잡하다.
 

오늘날 익산역 풍경 ⓒ 윤찬영

  

익산역 뒤로 해가 저물고 있다. 익산은 노을이 멋진도시다. ⓒ 서태멘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뀐 지 내년이면 꼭 삼십 년이 된다. 익산역도 마찬가지다. 도시는 여전히 철길 위에 서 있지만, 한때 영정통이라 불리던 중앙동 풍경은 많이 달라졌다.

역에 내려 동쪽 광장 위에 서면 멀리까지 번듯한 4차선 도로가 뻗어있지만, 도로 옆으로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장 횡단보도 앞에 서면 건너편 2층에 'OO보청기'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는 도시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풍경이라고도 했다. 한때 '호남의 명동'이라 불렸다던 옛 삼남극장 골목엔 빈 가게들이 더 많다.

이제 익산역에서 KTX를 타면 서울 용산역까지 1시간 15분이면 닿는다. 주말이면 익산역엔 여객열차만 234회 지나는데, 76회인 전주의 세 배가 넘는다. 이 가운데 고속열차(KTX, SRT)만 150회가 지나고, 주말이면 하루 2만 2000명 넘는 사람들이 익산역에서 타고 내린다. 지난 5월 한 달만 따져도 약 62만 명에 달했다.

익산은 지금도 철길 위에 서 있는 도시다. 그리하여 철길 위에서 바라보면 이 도시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어쩌면 앞으로 걸어갈 길도.
덧붙이는 글 [참고한 글]
김경남, “제국의 식민지 교통 통제 정책과 이리 식민도시 건설”, <지역과 역사>(2018)
원도연, “이리역의 비극과 현대도시 익산의 전환기”, <익산, 도시와 사람>(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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