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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까지만 해도 정월 대보름에 밥 훔쳐 먹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보름 전날 동네 형들과 몰려다니며 다른 집 부엌에서 밥을 훔쳐 커다란 그릇에 비벼 먹던 추억이 있다. 말이 훔쳐 먹는 것이지 집 주인이 일부러 훔쳐 먹을 밥과 나물을 준비해 놓았다.

열 나흗날 오곡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야 일꾼이 많이 생겨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집주인들은 모른 척했다. 밥 굶는 아이들을 위한 공동체의 배려였을 것이다. 요즘 같은 아파트 문화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많은 사람이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주차 문제나 층간소음이 폭력 사건으로 이어지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사유지라는 이유로 갑자기 길을 막아 통행에 불편을 주는 일도 일어난다.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현상은 각박한 인심을 만들고 공동체 붕괴를 부추긴다. 서로서로 무관심한 세상은 삶을 더 팍팍하게 만든다. 각자 열심히 살 뿐이다. 정희성 시인의 <숲>은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 시다.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숲>, 정희성

 

중국 전국시대 양나라 대부 송취가 초나라와 경계가 맞닿아있는 마을 현령으로 있을 때 일이다. 양쪽 모두 오이를 심었는데 양나라 사람은 부지런히 물을 주어 오이가 잘되었고 초나라 사람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 오이가 잘 자라지 않았다.

초나라 수령이 양나라의 오이가 잘 된 것이 싫어 밤중에 해코지하여 말라 버린 오이가 생겼다. 양나라 정장이 보복으로 초나라 오이를 해코지하려 하자 송취는 '이는 화를 같이 당하는 것'이라며 말리고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초나라 오이밭에 물을 주도록 하였다.  

초나라 정장이 매일 아침 밭에 나가보면 오이밭에 물이 이미 충분하고 오이가 날로 좋아졌다. 알아보니 양나라 정장이 한 일이었다. 초나라 수령은 대단히 기뻐하여 이 일을 초나라 왕에게 보고하였다. 초나라 왕은 양나라 사람이 남모르게 행한 일을 기뻐하여 크게 사례하고 양나라 왕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감사 이창정이 순천부사로 있을 때 일이다. 이창정과 이름도 같고 관품도 같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난한 선비가 딸 혼수에 도움받으러 왔다가 사또를 만나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순천부사가 친구인 줄 알고 찾아온 선비는 크게 실망하여 머뭇거리는데, 이창정은 자리를 권하고 까닭을 물었다. "어떤 일로 오셨소?"

선비가 사실대로 말했다. "딸년이 혼사를 앞두고 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도움을 받을까 찾아왔습니다." 이창정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고는 이방에게 일렀다. "이 선비를 후하게 대접하고, 혼수를 준비해주되 한 가지도 빠지지 않게 해드려라." 선비는 "비록 내 친구가 마련해 준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하지는 못할 것이요" 하며 무척 고맙게 여겼다. 

맹상군은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 왕족이며 정치가다. 이름은 전 문이다. 맹상군은 천하의 유능한 선비들과 제나라로 망명해 오는 인사들을 식객으로 우대했다. 맹상군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

"아버지께서 제나라의 재상 일을 맡아 지금까지 세 분의 왕이 계셨지만 제나라는 그 땅을 넓히지 못했고, 집에는 만금의 부가 쌓여 있지만 문하에 유능한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에 장수 집에서는 장수가 나고, 재상 집에서는 재상이 난다고 합니다.

지금 후궁들은 땅바닥에 끌리는 수를 놓은 명주옷을 입고 다니나 선비들은 짧은 바지도 얻어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인과 첩들은 쌀밥에 고기를 먹지만 선비들은 술지게미나 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또 재물을 잔뜩 쌓아두었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려고 하시면서 나라의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잊고 계시니,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이상합니다."

이에 전 영은 아들을 예우하여 집안일과 빈객을 대우하는 일을 맡겼다. 빈객들이 날이 갈수록 모여들었고 명성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갔다. 맹상군이 제후와 빈객뿐 아니라 도망친 범죄자들을 초빙하니, 모두 맹상군에게로 왔다. 맹상군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이들을 후대하니 천하의 인재들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식객이 수천이었지만 귀천 없이 모두 맹상군과 동등했다. 

맹상군이 객을 맞이하여 앉아서 대화하면 병풍 뒤에 늘 시사가 있어 맹상군과 객의 대화를 기록했는데 친인척이 사는 곳을 물었다. 객이 떠날 무렵이면 맹상군은 이미 사람을 보내 친척을 방문하여 예물을 드린 뒤였다. 맹상군이 언젠가 밤에 객과 식사를 했는데 누군가 불빛을 가렸다.

객은 밥과 반찬이 같지 않다고 여기고 화를 내며 밥그릇을 엎고 자리를 떴다. 맹상군이 일어나 직접 밥그릇을 들고 객의 것과 비교하게 해주었다. 객은 부끄러워 자살했다. 이 일로 인재들이 맹상군에게 더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은 객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잘 대우했으므로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맹상군과 친하다고 여겼다.

어디를 가도 서로 이익만 놓고 다툴 뿐, 양보와 배려와 희생이 없어 안타깝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숲을 이루려면 개개인은 어느 정도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각박하다고 탓한다면 어떻게 숲을 만들겠는가?
 
오정환 미래경영연구원장
 오정환 미래경영연구원장
ⓒ 화성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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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미래경영연구원장입니다.


태그:#화성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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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빠진 독 주변에 피는 꽃, 화성시민신문 http://www.hspublic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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