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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힘찬 기상이 지리산 만복대(1433M)에서 견두지맥(犬頭支脈)으로 흐른다. 이 산맥은 전남과 전북의 도 경계를 이루며 호두산(견두산, 803.6M)을 지나 천마산(653.8M)에서 작은 줄기가 호락산(220M)에서 섬진강을 만난다. 천마산에서 다른 큰 줄기는 곡성군과 구례군의 경계를 따라 계속 내려가 구례읍 병방마을에서 병방산(60M)에서 섬진강에 발을 담근다.
 
 남원 몽심재 호석 바위
남원 몽심재 호석 바위 ⓒ 이완우

호두산에서 5km를 서쪽으로 내려와 홈실에서 기운을 맺어 좋은 터전을 마련했는데 옆으로 누운 호랑이 형상이라고 한다. 이 자리 호두혈(虎頭穴)의 호랑이 턱 아랫부분에 고택 몽심재가 들어섰다. 몽심재의 안산(案山)은 호랑이 꼬리로 보니 호두산의 호랑이 정기가 힘차게 뭉친 명당 터에 몽심재가 자리했다고 한다.

몽심재의 솟을대문이 있는 문간채를 지나면 마당으로 올라서기 전에 길이와 너비가 몇 미터 되는 큰 호석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앞에는 호족시(虎足柿)라 불리는 200년 수령의 감나무가 있는데 줄기 밑동의 뿌리 부분이 호랑이 발을 닮았다.
 
 몽심재 호족시
몽심재 호족시 ⓒ 이완우
 
호석 바위에는 이 가문이 좌우명으로 삼은 한자 어귀가 각자(刻字)되어 있어 풀이해 본다.

主壹岩: 주일암, 온전히 한마음을 유지하라.
存心臺: 존심대, 본심을 지켜라.
千蒼崖: 천창애, 나라의 운명이 천 길 절벽이다.
靡他基適: 미타기적,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충실하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이 가문의 올곧은 정신은 이 호석에 새겨져 몽심재의 좌우명으로 오랜 시대를 이어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몽심재가 터 잡은 호곡리(好谷里) 홈실 마을은 원래 이름이 호랑이 울음이 들린다는 의미의 호음실(虎音室)이었고, 발음을 편하게 축약하면 홈실이 된다. 홈실 마을은 안홈실(내호곡)과 밧홈실(외호곡)이 있는데 몽심재는 안홈실에 있다.
 
 몽심재 문간채, 호족시와 호석바위
몽심재 문간채, 호족시와 호석바위 ⓒ 이완우
 
조선 시대에 천문과 지리에 능통했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가 전라관찰사를 정조와 순조 때 두 번 역임했다. 그는 남원 지역에 호랑이가 많아 백성들의 피해가 심하므로 호랑이의 기세를 꺾으려고 호두산(虎頭山)의 이름을 견두산(犬頭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영조 4년(1728)에 영조의 왕위 정통성을 거론하며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고 반군이 청주성을 함락하자 조선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무신란(戊申亂) 또는 영남란이라고도 하는 이 반란의 중심지인 경상도와 전라도의 호응 세력은 바로 진압되었다. 조정은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고 지역의 토착 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을 확대했다.

영조 15년(1739)에 남원 출신인 양찬규(梁纘揆)가 경상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동이 있었다. 영조 16년(1740)에 남원부를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하여 조선의 360개 군현 중 가장 끝에 두었다. 남원 지역의 엄청난 수치였으며 영조 26(1750)에 다시 남원부로 회복되었다.

이인좌의 난 후에 남명 조식(1501~1572)의 문하생이 많았던 경상 우도의 선비들은 과거에도 응시하지 못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 보면 남원 지역도 이인좌의 난에 협조적이었고 이런 정서가 오래 지속된 듯하다. 이런 배경으로 풍수지리에 능통한 이서구가 남원의 지역 세력을 우려하여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몽심재 호석 바위
몽심재 호석 바위 ⓒ 이완우

남원 수지면의 몽심재 호랑이 명당의 호석 바위는 호두산, 호곡리와 홈실 마을의 지명이 서로 연결된다. 홈실 마을의 이름에서 호랑이의 포효가 울리는 듯하다. 지리산의 정기 어린 한국 호랑이의 기상을 몽심재 고택 마당 호석 바위에서 느껴본다.

#남원 몽심재 호석#남원 호두산#몽심재 좌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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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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