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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삶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을까

연구라는 업을 새로 접하면서, 성별에 따라 다른 수치를 보여주는 여러 데이터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내가 가지고 있거나 찾아보는 자료는 주로 남성에서 나타난 결과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여성에서는 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힘껏 변명해야 한다. 이럴 땐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던 앞선 사람들을 참고해야 한다.

국내 직업 건강 관련 학술지에 "성별에 따른 차이 (sex difference)"를 검색해본다. 성별에 따른 직무의 차이,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쉽게 탈락하는 경향, 퇴근 뒤에도 주어지는 두 번째 직무인 가사노동 등 참고할 사항은 많다. 그 자료들을 받아 적으며 다시 고민이 든다. 왜 우리는 이런 변명을 반복하고 있을까.

여성이 일 가사 이중부담을 지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안다. 그런데 이 분야의 연구자들이 흔히 쓰는 국민건강영양조사 등 건강 관련 조사는, 신체활동 시간은 물어도 "집에서 가사노동을 평균 몇 시간 하시나요?"라고 묻지 않을까.
 
 여성노동자들의 일터와 삶을 잘 번역하고, 또 담아내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많은 것들을 함께 얘기해보자.
여성노동자들의 일터와 삶을 잘 번역하고, 또 담아내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많은 것들을 함께 얘기해보자. ⓒ 워드클라우드
 
언니들의 삶을 잘 번역해내고 싶다

연구에 사용되는 많은 데이터가 남성에서 주로 설명력을 갖는다면, 우리가 하는 연구 방식이나 수집된 데이터 자체가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는 데 구멍이 있다는 뜻일 수 있겠다. 언니들의 삶이 충분히 수집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부채감이 이어진다. 무언가 다른 접근이 필요하겠다는 고민도 든다.

"과학적 원칙들이 수립된 방식은 유해한 작업 요인들, 특히 여성의 작업에서의 위해 요인을 인식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지적과, (일-가정 충돌에 대해 다룰 때) "직장을 가정생활에 최대한 덜 방해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해결이라는 서술을 다시금 곱씹는다.

가사노동에 관해 묻더라도 답변이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통계청 생활시간조사 통계에 의하면, 가사 분담에 대한 견해에서 "공평하게 분담"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2006년 32.4%에서 2022년 64.7%로 뛰었다. 그런데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에 대한 기혼자의 응답은 2004년 "여성 1일 평균 255분, 남성 40분"에서 2019년 "여성 1일 평균 225분, 남성 64분"으로 아주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하고 알아내려는 시도는 필요할 것이다. 직접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자료에 무급 가사노동 시간을 묻는 데이터가 없다면, 다른 문헌의 자료들과 매칭해서라도 꾸역꾸역 분석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본다.

여성들의 노동과 삶과 시간을 잘 엮어내고 싶다

업무의 차이, 사업장의 차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남성과 여성과 논-바이너리(non-binary). 성별마다, 직종마다, 수입마다, 삶의 현장이 서로 너무나 달라서 우리는 물리적인 이 공기만 공유하고 있을 뿐 (심지어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살 수 있는지도 가진 돈에 따라 현저히 다르니, 사실은 마시는 공기마저 다른 셈이다), 실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모두가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임신, 출산, 육아에 헌신한 언니들은 지금 공단에, 마트에, 학교 공무직에 있다. 언니들의 손은 빛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언니들의 삶과 성품과 솜씨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멋진 직업인들이 많은데, 통계나 제도의 공백을 마주하면 잊혀진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요새 만나는 사람들은 과거의 광부들이다. 그 광산 마을에 살았던 여성 선탄부들은 어디에 있을까. 지역 N 문화 누리집에는, 2003년 3월 태백중앙병원에 요양 중인 여자 진폐 환자가 8명이라고 적혀 있다. 2008년 기사에 따르면 태백중앙병원의 진폐증 환자가 370명이었다고 하니, 입원한 진폐증 환자 중 여성은 2% 정도밖에 안 됐던 셈이다. 선탄부들도 폐암으로 고생하고, 삶을 다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과 죽음의 상당수는 산재라는 통계에서, 젠더라는 약한 고리를 통해 빠져나갔을 것이다.

왜 산재는 신청도 승인도 여성이 훨씬 적을까. 산재라는 제도에 군필자 환영, 이런 요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산재 신청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병원에서 모아서 내는 작업도, 언니들은 할 시간이 없다. 퇴근 이후의 시간조차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을 돌보기 위한 시간, 공금 등 가사를 위한 시간을 제외한다면, 여성들은 1년에 연차를 자신을 위해서 며칠이나 쓸까? 연차를 자신이 신청하는 때에 받을 수 없는 노동자도, 연차가 없는 초단시간 노동자도 여성이 많다.

언니들의 빼앗긴 시간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싶다. 그래야 나도 좀 숨통이 트일 것 같다. 각자의 삶을 짓누르는 차별적인 조건들은 모두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망을 더 단단하게 엮어내는 일을 하고 싶다. 그 작업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더디더라도 촘촘히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양문영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여성노동건강권팀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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