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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에만 몰두하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분야가 연극이나 회화, 연주, 춤처럼 예술 쪽이라면 더욱 어렵다. 어떤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먹고사는 일이 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적 창조에 몰두하기 위해 벌이가 보장되는 안락한 일상을 과감히 내던진 예술가가 있다. 바로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에 등장하는 화가 스트릭랜드이다.

예술을 입신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예술가
 
 1919년 발표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표지사진
1919년 발표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표지사진 ⓒ 민음사

주식 중개인이었던 40대 중반의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갑자기 파리로 그림을 그리러 떠난다. 그는 교양 있는 부인과 전도유망한 아들, 딸을 버리고 멀쩡하게 영위하던 보편적 삶의 방식을 자발적으로 가차 없이 종결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이기적이다, 무책임하다 비난했지만, 그는 오직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예술적 비전을 그림으로 구현해 내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인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 먹고 입고 자는 삶의 필수적 요소들과 친구, 동료 같은 사회적 관계들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심지어 병에 걸린 자신을 돌봐준 친구의 부인을 취하며 비열하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자신에 대한 세상의 평이나 명망, 그림을 팔아 얻을 수 있는 이익에도 전혀 무관심한 채 그림에만 전념한다. 

도시에서 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그는 남태평양의 타히티라는 섬에 정착하고 나서야 고향에 온 듯한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 자신을 이해하는 원주민 아내의 보살핌과 태곳적 삶이 여전히 영위되고 있는 그 섬에서 그의 그림들은 비로소 원숙해진다. 

<달과 6펜스>는 스트릭랜드라는 천재화가를 통해 예술적 충동이 얼마나 한 사람을 강렬하게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 열정을 위해 얼마만큼의 헌신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궁핍한 생활에 허덕이면서도 예술행위 자체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생산해내려는 간절함만으로 추동되는 예술가. 예술을 입신의 방편으로 삼지 않는 예술가의 겸허하면서 숭고한 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편, 예술이란 자기만족에 더해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필수 동력으로 성장하고 꽃 피우기 마련일 텐데, 과연 사람들의 공감과 인정을 도외시한 채 평생을 예술에 헌신할 수 있는 예술가가 진정 실재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끝까지 떠나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1919년 발표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주식 중개인을 하다 그림을 시작한 폴 고갱의 생을 기반으로 창작되었다고 한다. 발표 후 인기가 높았는데, 예술적 열정을 쫓아 안락한 일상을 버린 천재화가의 이야기가 당시 세계대전에 염증을 느낀 동시대인들에게 영혼과 순수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서머싯 몸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보호 아래 영국 런던에서 의학교를 졸업했다. 산부인과 경험을 옮긴 첫 작품이 인기를 얻어 의사의 길을 과감히 버리고 작가가 되었다고 하니, 어쩌면 <달과 6펜스>는 가슴 뛰는 일을 쫓아 작가의 길을 선택한 저자가 밝히는 예술적 지향점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간절함과 예술에 대한 헌신적 태도가 천재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야기 막바지에 불모지의 섬을 일생 아름답게 가꾸어 냈다는 브뤼노 선장을 예로 들어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예술적 지향이 공감 가능한 지점을 보여준다.

"...나도 나름대로는 예술가였다고. 내게도 그 친구를 움직인 그런 욕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 친구가 그걸 그림으로 표현했다면, 나는 인생으로 표현했을 뿐이지요." (277쪽)

"난 아무것도 없던데서 뭔가를 만들어냈어요. 나도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셈이죠. 정말이지, 선생은 모를 겁니다. 그 멀쑥하게 자란 튼튼한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저것들은 다 내가 심은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의 기분이 어떤 건지." (278쪽)


여성을 그리는 시각에서 아쉬움도

우리는 웬만해선 살던 대로 살아가는 일에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브뤼노 선장의 일화를 통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내면에도 좋아하는 뭔가를 깊이 파고드는 순수한 열정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예술적 열정을 쫓는 삶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노력 끝에 다다른 어떤 결과물은 세상의 잣대와는 상관없이 자족할만한 보람을 가져다주지 않느냐고 독자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달과 6펜스>은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하고 모순되는 심리묘사가 뛰어나다. 남편이 떠난 일을 괴로워하면서도 냉정히 따질 것은 따지는 스트릭랜드 부인의 이중적 태도라든가, 스트릭랜드의 삶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도 예술가로서는 공감하는 작중 화자 '나'의 태도 등이 그렇다. 인간 심리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가 돋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의 여성관이 본래 그런 것인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잘 드러내려 그런 것인지 모호하게 작품 여기저기에 여성비하의 시각이 드러나는 점이다. 스트릭랜드가 부인 에이미를 여자라서 머리가 나쁘다고 단정한다거나, 병든 자신을 돌봐 준 블란치를 두고 여자란 그저 사랑밖에 몰라 남자를 옭아매려 한다고 치부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런 한계가 보인다.

그럼에도 자신의 열정을 쫓아 뭔가를 시도하는 일에 고민 중인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살던 대로의 삶이 아닌 가슴 설레는 삶 쪽으로 한 발 내딛을 용기 한 움큼쯤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그림, 춤, 연극, 글쓰기 등에 매력을 느끼는 분들도 읽어보면 좋겠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서 얼마나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느끼는지, 그 길에 얼만큼이나 매진하고 있는지 조용히 생각해 볼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과 6펜스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2000)


#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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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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