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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랑을 받은 면이 당면이다. 당면은 명절이나 잔칫상에 꼭 올라가는 음식중 하나인 잡채의 주재료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즐겨먹는 먹거리 중 하나다.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랑을 받은 면이 당면이다. 당면은 명절이나 잔칫상에 꼭 올라가는 음식중 하나인 잡채의 주재료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즐겨먹는 먹거리 중 하나다.
ⓒ 양덕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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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랑을 받은 면이 당면이다. 당면은 명절이나 잔칫상에 꼭 올라가는 음식중 하나인 잡채의 주재료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즐겨먹는 먹거리 중 하나다. 당면의 역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고 오래됐다. 당면은 우리 음식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는 재료다.

인천은 당면의 역사가 오래된 지역이다. 인천에도 일제 강점기 시절 화교가 운영한 당면공장이 있었다. 당면공장은 화교 양복주(楊福州, 1907년생)와 그의 형제들, 아들들이 운영한 가족회사였다.

양복주는 1926년 1월 22일 중국 산둥에서 인천으로 이주했다고 그의 손자 양경태(楊敬泰, 55)씨는 전한다. 양복주는 이미 평양에서 당면기술을 배운 기술자였다. 화교 양복주 형제와 아들들이 운영했던 당면공장의 이름은 태흥식품공업사(泰興食品工業社)였고 당면 브랜드는 '쌍룡표(雙龍標)'였다.

인천에 온 양복주는 송월동에 정착해 집에서 전분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전분을 팔아 모은 돈으로 도화동 인천대 제물포캠퍼스 부근에 천생동(泉生東)이란 회사를 차리고 당면제조와 기름을 짰다. 
         
무역상, 당면공장, 요릿집... 인천에 터전을 다지다

양복주의 손자인 화교 양경태씨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1931년 중국 만주에서 발생한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배척 운동이 일어나자 도화동 천생동을 떠나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피난을 갔다고 전한다. 만보산 사건으로 한국에서 화교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고, 당시만 해도 변두리였던 도화동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던 차이나타운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화교 양복주의 형제들은 인천에서 무역상, 당면·방직·기름공장, 요릿집 등을 하며 인천에서의 터전을 다졌다. 이들은 천생동, 복생동(福生東), 복생루(福生樓)라는 사업체를 운영했다. 지금과 달리 일제강점기 때는 화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았다. 양경태씨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는 화교들이 차별받지 않고 일하기 더 편했다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인천에 화교가 운영하는 무역상들이 많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천생동, 복생동이라는 무역상이 있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려진 사실이다.
 
화교 양복주 형제와 아들들이 운영했던 당면공장의 이름은 태흥식품공업사(泰興食品工業社)였고 당면 브랜드는 '쌍룡표(雙龍標)'였다.
 화교 양복주 형제와 아들들이 운영했던 당면공장의 이름은 태흥식품공업사(泰興食品工業社)였고 당면 브랜드는 "쌍룡표(雙龍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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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구 용현동 36번지에 있었던 태흥당면공장
 미추홀구 용현동 36번지에 있었던 태흥당면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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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동에서는 당면을 만들었고, 복생동은 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무역선을 소유하고 있었고 방직·기름공장을 운영했으며, 복생루는 요릿집이었다. 복생동과 복생루는 지금 중구 신포동 옛 외환은행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당면은 겨울에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면은 추운 겨울날 얼리고 다시 건조해서 만드는 식품이다. 그래서 대만에서는 당면을 '동분(冬粉)'이라 불렀다. 양경태씨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는 냉동시설이 없었기에 당면은 추운 겨울에만 작업이 이뤄졌다. 당시는 방직이 가장 잘되는 사업이었다.

방직은 중국에서 왕씨 성의 방직기술자를 초빙했고, 방직기계는 인천에서 50대를 제작했다. 이곳에서 만든 면직물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문양을 넣어 짰기에 기생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잘 팔렸다고 한다. 방직업으로 돈도 많이 벌었다.

방직사업을 하며 짜두었던 옷감은 6.25 전쟁 중에 요긴하게 쓰였다. 직물은 포탄이 떨어지는 전시상황에서도 식량과 바꿀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양복주 가족들은 옷감 때문에 전쟁중에도 식량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번창했던 방직업은 1950년대 초반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싸고 질긴 나일론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면직물 산업에 위기가 찾아왔고 양복주 동생의 방만한 사업운영이 중첩되면서 방직을 정리하게 됐다는 게 양경태씨 설명이다. 방직사업을 맡았던 양복주의 동생은 별명이 '화교은행행장'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사람 좋고 돈 잘 쓰는 호인이었지만 사업가는 아니었던 셈이다.

냉동창고가 가져온 변화

화교 양복주 형제들은 도화동에 이어 용현동에 터를 잡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당면사업에 뛰어든다. 당면공장의 위치는 미추홀구 용현동 36번지로, 지금 새한아파트 자리다. 이들이 본젹적인 당면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냉동창고 덕분이었다. 냉동창고 출현으로 당면은 연중 작업이 가능해졌다.

용현동 태흥식품공업사에서 만드는 쌍룡표 당면은 100% 제주도 고구마 전분으로 만들어 인기가 좋았다.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당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품질이 월등했다. 당시 인천에도 요릿집이 많이 생기면서 당면의 수요가 급증하자 공장에 현금을 싸 들고 와서 물건을 가져갈 정도로 품귀현상이 벌어졌다. 

태흥당면공장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곳에서 일했던 화교노동자의 딸이 1962년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2등을 한 일도 있었다. 1961년 19살이었던 이수영은 부모가 산둥성 출신 중국인인 화교 2세로 부친은 태흥당면공장의 노동자였다. 이수영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대회에서 2등으로 뽑혔는데 이는 동양인 최초의 준 미스유니버스였다고 한다.
 
당면을 말리는 장면. 당면은 겨울에 얼려야 했기에 추운겨울에만 작업이 가능했다.
 당면을 말리는 장면. 당면은 겨울에 얼려야 했기에 추운겨울에만 작업이 가능했다.
ⓒ 양덕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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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없어서 못 팔정도로 잘 나가던 당면사업에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쳤다. 1980년 초 구정을 앞두고 냉동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났다. 공장만 폭파된 게 아니고 인명사고도 있었다. 이로 인해 사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당면공장은 사고가 난 뒤 경기도 안산으로 옮겼고 1987년까지 운영한 뒤 한국인에게 넘어갔다.

양경태씨는 당면공장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했다. 생전 할아버지 양복주가 손자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집안은 당면사업이 잘 돼 늘 넉넉했다. 화교학교 친구들중에는 도시락을 못 싸오는 경우도 많았고, 학교가 끝나면 중국집 일을 도우러 가는 친구들도 꽤 있었지만, 그에게는 그런 걱정은 없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그에게 늘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다독였다. 1970년대 양복주의 집은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외제 자동차를 몇 대씩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부자였다.

양경태씨는 용현동에 있는 화교학교 분교인 평산(平山)학교를 다녔는데 주변 한국인 학생들로부터 큰 집에 사는 '떼국놈'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당시 용현동 주변에서 양경태씨 집이 제일 컸기 때문이다. 당면사업이 번창하면서 떼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양복주는 화교사업가답게 인천 화교사회의 발전에도 상당한 역할과 기여를 했다. 인천화교학교 강당인 부흥당이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무너지자 이를 건립하는 기금을 내놓기도 했고, 인천화교들의 권익과 발전을 위해 화교협회에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양복주의 동생 양복유(楊福有)와 아들 양감민(楊鑑珉)은 화교협회 부회장과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인천화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일했다. 이들이 화교협회 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양복주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양경태씨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인천에서 사업을 했지만, 돈을 벌면 고향 중국 연태에 땅을 많이 샀다고 한다. 비록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땅을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중국인들의 마음인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심정으로 타국에서의 삶을 영위했다. 

인천화교로서의 바람
 
양복주의 손자인 양경태씨가 자신의 가족이 운영했던 태흥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양복주의 손자인 양경태씨가 자신의 가족이 운영했던 태흥탕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 양덕채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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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회사였던 당면공장은 형제들이 분가하면서 첫째인 양감장(楊鑑璋)이 이어받았다. 양감장은 키183㎝에 175㎏의 거구였다. 당시에는 100㎏이 넘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연안부두에 나가면 아버지 양감장은 스타였다. 양감장은 당면공장을 접은 뒤에는 용현동에서 '태흥탕'이라는 목욕탕을 운영했다. 당시는 대부분이 목욕탕을 이용하던 시절이라 목욕탕 사업은 잘 됐다. 목욕탕은 1990년~2000년대까지 잘 됐었다고 한다. 

인천화교 3세인 양경태씨는 1990년대 시작된 북방정책 덕분에 한국과 중국의 외교가 열리자 기아자동차 외국인 사원 1호로 뽑혀 중국 자동차공장에서 일했던 경력을 갖고 있다.

기아자동차를 그만둔 뒤에도 중국에서 외국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스크린골프 사업을 10년간 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사업의 피가 그에게도 흘렀던 것이다. 

양씨는 5년동안 한국과 중국을 잇는 교류사업에도 참여했다. 경기도 화성시가 주최한 화성~칭다오~레주를 뱃길로 잇는 한중화성레주컵 대회를 직접 맡아 운영하며 한중의 우호교류에 가교역할을 했다. 한중교류 사업에 화교인 자신이 적임자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양씨는 지금도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한국에서 살면서 화교로써 불이익을 받아 가슴 아프고 상처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는 그래도 한국과 인천을 사랑하는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귀화도 생각하고 있지만, 100여 년 인천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 인천화교들의 삶과 지위가 조금 더 좋아지길 바라고 있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양덕채 자유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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