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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영이 나와." "애 아부지는 없는디유..." "어디 갔어?" "글씨 어제 나가서 안즉 안 왔는디유."

충남 태안경찰서 소원지서 경찰의 물음에 정춘영의 아내 이예순이 답했다. 경찰들은 찾던 사람이 없자 논에서 일하던 정춘영의 동생 정성영을 대신 연행했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방침에 따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태안경찰서는 상부의 명령을 받아 6월 말부터 7월 11일까지 보도연맹원들을 붙잡아 들였다. 좌익 전향자 등으로 꾸려진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이 남하하면 협력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초기에 연행된 태안 지역 보도연맹원 일부는 트럭에 실려 대전형무소 방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트럭은 예산군 오가면에서 멈췄고 그곳에서 그들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태안보도연맹원 일부가 대전 방향으로 이송된 사실은 태안경찰서 소속 조정찬 경위의 순직 사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태안서 소속 좌기 직원은 동년(1950년) 7월 9일 좌익극렬분자(보련) 등을 대전형무소에 압송도중 홍성 장곡면에서 ××의 교통방해로 인한 자동차 발화사고로 불행히도 소사 순직하였음(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석유 뿌리고 예광탄을 쏘아
 
 태안군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학살된 사기실재
태안군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학살된 사기실재 ⓒ 박만순
 
나머지 태안군 보도연맹원 대다수는 서산군 태안면(현재 태안군 태안읍) 백화산 사기실재로 끌려 갔다. 저녁 무렵 이들을 실은 트럭은 사기실재 고개를 넘지 않고 고개에서 멈췄다. 

보도연맹원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고 트럭에 내릴 때도 짐짝 버리듯이 버려졌다. 그들은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앞서 경찰은 태안경찰서 마당에서 보도연맹원을 2인 1조로 세워 등을 마주 보게 했다. 그런 후에 두 사람의 엄지손가락을 철사로 묶었다. 고통에도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총 개머리판이 사정없이 날라왔기 때문이다.

사기실재에 버려진 이들의 머리 위에는 석유가 부어졌다. 잠시 후에 예광탄을 쏨과 동시에 일부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의 옷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옷과 살이 타면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엄지손가락이 철사로 묶인 이들은 살기 위핸 몸부림을 쳤다. 몇몇은 이인삼각(二人三脚)하듯이 발을 맞춰 도망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경찰의 조준사격을 당했다. 잠시 후 시신 타는 냄새와 총소리가 뒤섞여 사기실재는 '지옥도' 그 자체였다.

참혹한 죽음보다 더 놀라운 일이 그 다음에 벌어졌다.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경찰들은 새카맣게 그을린 시신들을 트럭 적재함에 실었다. 총에 맞아 떨어져 나간 팔, 다리도 전부 포함됐다.

잠시 후 시신을 실은 트럭은 태안면 고추판매소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경찰들은 새카맣게 탄 시신 백여 구를 버리고 사라졌다. 1950년 7월 12일 초저녁의 일이다. 시신을 본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거나 구토를 해댔다. 사망자 유족들은 경찰이 태안에서 후퇴한 다음 날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서산군 덕지천(현재의 서산시 덕지천동)에서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보도연맹원 일부가 죽임을 당했다.

앞서 등장한 모항리 정성영도 이때 죽었다. 보도연맹원인 형이 집에 없다는 이유로 대신 연행됐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정성영이 사기실재에서 죽었는지, 덕지천에서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소원면 모항리 보도연맹원 11명을 포함한 태안군 보도연맹원 1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항초등학교 부자 교사의 죽음

 "컹컹." 그로부터 얼마 후인 9월 말경. 어두컴컴한 밤 모항리 초입에서 시작된 개 짖는 소리는 온 마을로 번졌다. 그렇게 모항초등학교 교장 국계환(당시 42세)의 집에 들이닥친 불청객은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이었다. 인민군이 주둔하고 난, 소위 인공(인민공화국) 시절 완장을 찬 이들이다.

"국계환이 나왓!" 주인장이 방문을 열자 그들은 "뭘 꾸물거려, 빨리 나오지 않고"라며 큰형뻘이자 아버지뻘인 국계환 교장에게 반말을 해댔다. 아내와 자식들은 아버지가 불청객들에게 뒷결박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화살은 국교장의 아들 국병녕(당시 20세)에게도 향했다. "야, 병녕이도 묶어"라는 지휘자의 말에 국병녕도 뒷결박을 당했다. 불청객들이 물러나자 교장 집에서는 곡(哭)이 터져나왔다.

국계환·국병녕 부자는 모항초등학교 교사로 아버지는 교장이었고 아들은 평교사였다. 이들은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 지방 좌익에게 반동이라는 이유로 끌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부농도 지주도 아니었다. 단지 초등학교 선생이었을 뿐이다.

1950년 9월 20일 연행된 이들은 모항리 안상각의 소금창고로 끌려갔다. 이후 20일 가까이 구금됐던 이들은 10월 9일 모항리 해변으로 끌려 나왔다. 지방 좌익들은 국계환·국병녕 부자를 에워쌌다. 지휘자의 턱짓에 사람들 손에 쥐어져 있던 죽창과 쇠스랑이 내질러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죽창과 쇠스랑을 죈 이들의 옷과 얼굴에도 피가 튀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앞선 7월 모항리에서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이의 유가족도 있었다. 보복 학살의 시작이었다.

계급갈등과 씨족갈등이 겹쳐

국계환·국병녕 부자처럼 반동과 우익(가족)이라는 이유로 지방좌익에게 학살된 소원면 모항리 사람은 17명이다. 당시 모항리는 3개 구에 불과했으니 엄청난 수치다. 

피해자의 직업은 국계환·국병녕 부자를 제외한 15명 모두 농업이었다. 또 전직 이장 5명, 현직 이장 3명이 희생됐다. 이외에도 국교환은 대한청년단원이라며, 국응선은 형 국중곤이 경찰과 친분이 있어서, 박일옥은 이장으로 있으면서 우익조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살생부에 올랐다. 이들은 안만순·안상각 부자의 소금창고와 분주소 등지에 구금되어 있다가 모항리 해변에서 죽거나 서산군 양대리, 소원면 파도리 등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UN군이 반격해옴에 따라 북한군과 지방좌익은 후퇴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군경가족이나 우익인사, 그들의 가족을 집단학살했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런데 태안군에서는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집단학살(적대세력에 의한 사건)이 유독 많았고 방식도 잔인했다. 소원면 모항리가 특히 그랬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계급 갈등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찮은 면이 있다.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사례를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답이 나온다. 모항리 피해자 17명 중 국씨가 10명이다. 가해자는 지방좌익과 일부 보도연맹원 유가족이다. 그런데 후일 경찰이 수복한 후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부역혐의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모항리 사람 61명 가운데 정씨이거나 정씨 가족이 42명이었다. 즉,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과 '부역혐의 사건'의 피해자 중에 국씨(58%)와 정씨(68%)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최태육 소장은 "6.25 전쟁 전부터 소원면 모항리에 내재해 있던 씨족간 갈등이 전쟁으로 인해 증폭된 것"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인 계급갈등에 씨족갈등이 더해진 경우이다. 모항리에서만 전쟁 때 89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했다.

치안대가 처형에 앞장서

다시 시간이 얼마 흐른 1950년 10월 초.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 정춘영 집에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소원지서 경찰들이 형 정춘영이 없자 그의 동생 성영을 잡아간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상황은 비슷했다. 이번에는 그 불청객이 경찰이 아니라 치안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또 3개월 전에는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했다면 이번에는 인공 시절(북한군 점령시절) 부역행위가 문제가 됐다.

춘영과 그의 동생 완영과 연영이 붙잡혀갔다. 정춘영 삼형제를 연행한 이들은 소원면 자치치안대(이하 치안대)원들이었다. 치안대원 중에는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피해자 유가족들도 끼어 있었다. 치안대는 소원지서 경찰이 수복하기도 전에 부역혐의자를 임의로 검거·연행했다. 경찰이 수복한 후 공식적으로 '부역자심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소원지서장이 중심이 되어 대한청년단 간부, 의용소방대 간부, 면장,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피해자 유가족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부역혐의자들을 A, B, C 등급으로 구분했다. A급으로 분류된 사람은 대부분 즉결처형되었고, B급은 일부가 처형되었고, 일부는 재분류 후 처형되거나 훈방되었다. C급은 훈방되었다.(<태안 민간인학살 백서>, 2018) 심사위원회에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 유가족들이 참여해 사감(私感)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경찰 수복 후 충남 태안군의 부역혐의자 검거 및 학살에는 태안경찰서가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소원면과 이북면(현재의 이원면)에서는 치안대가 직접 처형에 참가했다. 소원면 모항리에서는 주민 61명이 불법 처형되었다. 모항리 정연영·완영 형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신덕리 해안에서 죽었고, 정춘영은 시목리 장재 금광구덩이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도 모항리 해변에서 집단학살이 발생했다. 소원면 '피의 살육제'는 1950년 10월 5일경부터 11월 4일에 걸쳐 일어났다.

학살 방식은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과 비슷했다. 죽창과 쇠스랑으로 무장한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떼죽음으로 몰고갔다. 모항리 해변에서 죽임을 당한 27명의 얼굴은 죽창과 쇠스랑에 훼손돼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남매 옷을 벗겨 고문을 하기도

11월 초까지 이어진 부역혐의자 학살 이후에도 치안대는 해체되지 않았다. 치안대는 정낙설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부역혐의자를 추가로 연행해 구타하고 고문했다. 정춘영의 아들 정낙관(당시 14세)도 수차례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같은 마을의 정씨 남매(집 나이 13세, 16세)도 치안대 사무실에 연행되어 옷이 전부 벗겨진 채 고문을 당했다. 야만의 시대에 광기 어린 풍경이었다.
 
 숙부들이 학살된 태안군 소원면 신덕리 해안(당시는 바닷가) 현장에 선 정낙관.
숙부들이 학살된 태안군 소원면 신덕리 해안(당시는 바닷가) 현장에 선 정낙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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