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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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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길은 온갖 고초가 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어(중국어)가 통하여 중국인들과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18세 때에 관립한어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대한협회에서 활동할 시기 『대한협회보』에 실린 「해외정형(海外情形)」ㆍ「외국정황(外國情況)」 등의 외신을 통해 중국정세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옌징에 도착하여서는 먼저 이곳에 와 있던 무관학교 동기생 조성환을 만나 중국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신규식은 1909년부터 1922년까지 10여 년 동안 160여 수의 율시와 산문시를 지었다. 국치 전야에서 중국 망명기간이다. 『아목루(兒目淚)』 "나라를 빼앗긴 소년의 피눈물"이란 제목이 말해 주듯이, 망명객의 아픔과 슬픔을 현지에서 그때 그때 지은 기록이다. 『아목루』에서 그가 거쳐간 망명길의 코스를 살필 수 있다. 

「서울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며」이다.

 강물은 저와 같이 흘러가는데
 언제나 다시 동으로 돌아올까
 수없이 많은 열혈 인사들
 박랑사에서 환호성 부르리라. (주석 6)


박랑사(博浪沙)는 한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하자 장량은 원수를 갚고자 창해역사에게 철퇴를 들려 시황제를 저격케 하였는데 빗나가서 시황제의 부거(副車)를 맞췄다는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그에게 시황제는 일본제국주의였다.

압록강 건너 안둥(安東:현 단둥)에 도착, 여관에서 일박하면서 「안둥현 1번지에 도착하여」를 지었다. 먼 길을 오느라 봄날의 흙먼지를 뒤집어 쓴 초췌한 망명객의 모습이 드러난다.  

 귀신 형상에 먼지 투성이 되어
 흐트러진 머리에 모자도 없이
 세 조각 문창호지로 싼 봉지에 
 구명 약 몇 봉지 싸서 넣었네
 나라 잃은 아픔은 사무치는데
 갈 길의 어려움이 웬 걱정이람
 안둥 고을에 이르러 내렸으나
 벗들도 내 얼굴 못 알아 보누나. (주석 7)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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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만에 옌징(연경, 燕京)에 도착하였다. 청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래 옌징은 우리 민족에는 숱한 애환이 서린다. 해마다 철마다 조공ㆍ동지사 등이 드나들었다. 이곳에 도착하여 조선의 영사관을 찾았다. 물론 을사늑약 이후 폐쇄되었다.

 한 번 서울을 떠나 어언 삼천리 길
 해질녘 옌징에서 옛 친구를 찾았네 
 말 없이 눈물지으며 이윽히 마주보니
 중화 땅의 소식 정녕 진실이었던가. (주석 8)


옌징에서 1주일 가량 머물다 톈진에 이르러 프랑스 조계의 한 여관에서 숙박하였다. 

 톈진의 다리 위로 미인들 오가고
 불조투에선 세상사 논하는구나
 주인장은 내 마음의 고충 아는 듯
 무슨 장사하느냐고 친절히 묻네. (주석 9)


주석
6> 『전집①』, 100쪽.
7> 앞의 책, 101쪽.
8> 앞의 책, 105쪽.
9> 앞의 책, 10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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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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