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백두산 등정을 마친 2018 창의융합형 인문학 기행단은 8월2일과 3일에 걸쳐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행정중심지 연길(延吉)과 중국과 북한과 러시아 접경지대 훈춘을 탐방하고 이곳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유적과 재중동포(조선족)들의 생활을 돌아보았다.
인문학 기행 7일차 연길에 여장을 풀었던 기행단은 이른 아침을 먹고 용정 시내를 거쳐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 나운규 등을 길러낸 명동촌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가가 있으며 수많은 민족 지사를 길러낸 명동학교가 있다.
항일 문화교육 운동의 중심지 명동촌 그리고 윤동주
명동촌은 용정시내에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지역 한인의 항일운동, 문화교육운동의 중심지였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이곳에 이주하여 살고 있다는 촌장은 "지금은 자식들이 모두 한국이나 도시로 떠나 수십여 가구가 남아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지만 과거에는 이 일대에 수천가구가 살았다"고 말했다. 현지 안내판에는 명동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명동촌은 룡정시구역 동남쪽 20여Km 떨어진 지신진 륙도하량안에 자리잡고 있다. 1899년 2월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출신인 김약연과 김하규, 종성출신인 문치정과 남위원 등 25세대 142명이 집단으로 이곳에 온 다음부터 이곳은 점차로 새로운 삶의 터전, 민조교육의 요람, 반일애국활동의 활무대로 꾸려졌다.
용정시내와 명동촌으로 가는 길은 거리의 간판, 낮은 산, 마을의 지붕들이 흡사 조선족이 많이 사는 서울의 어느 거리 또는 한적한 충남의 여느 농촌 마을 풍경과 같았다. 특히, 명동촌은 북한 회령에서 강을 건너와 하루만 걸어오면 닿는 곳이다. 공안초소 군인들이 올라와 검문을 하고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과거 선조들이 왜 이곳에 정착했는지도 짐작해 보았다.
이윽고 기행단 일행은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도착하였다. 기행단 일행은 생가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생가 옆에 마련된 기념관과 그의 시비를 둘러본 후 바로 이웃에 있는 명동학교로 이동하였다.
김약연을 비롯한 민족 지사들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열심히 살았고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문화과학지식과 재능을 지닌 반일투쟁인재들을 양성하기에 전념하였다.
1908년부터 1925년 명동중학교가 폐교되기까지 명동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는 저명한 반일의사와 교육자, 수많은 반일무장투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그후 명동학교는 소학교만 두면서 지금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지 안내판)
기행단은 이 마을 촌장의 안내로 지금은 새롭게 지어진 명동학교 교실에 앉아 유래와 민족사적 의의 등을 경청하였다. 특히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고 장난꾸러기였던 송몽규, 내성적이고 문학적 감수성이 높았던 윤동주, 그들 보다 한 살 아래 문익환 등에 얽힌 일화를 듣고 영화 <동주>를 떠올리기도 했다.
명동학교 관람을 마친 기행단은 다시 버스로 30여 분을 이동하여 윤동주 시인의 묘소로 향했다. 시인의 묘소는 용정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하고 헌화와 묵념을 한 후 그의 일생에 대해 조별 토론을 했다.
토론을 마친 기행단은 용정시내로 가서 점심을 먹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전적지로 향했다.
청산리 대첩비를 찾아가는 험난한 길
청산리 대첩비는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산촌 임장(林場)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920년 이곳에서 김좌진,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서일의 북로정서군이 연합하여 10차례 일본과 싸우며 대승을 거둔 곳이다. 대첩비 뒷면에 기록된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의 건립취지문에는 이곳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해내외를 진감한 청산리항일대첩은 항일투쟁사상 천고에 빛날 력사적 전역이어늘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 홍범도가 통솔하는 항일련합 부대는 화룡시 23도구에서 연변 각 민족 주민의 대폭적 지원 하에 협동 작전으로 백운평 와록구 어랑촌 874고지 고동하반전투 등 대소 수차 격전을 거쳐 천으로 헤아리는 일본침략군을 섬멸하였거늘 소수로 다수를 타승한 이전과는 연변 내지 동북지역 반일무장 투쟁사상 새로운 시편을 엮음은 물론, 조선 인민의 반일민족독립 운동을 주동한 력사로서 청사에 새겨졌어라...
그런데 이날 기행단의 청산리 대첩비 방문은 중국 공안의 출입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한 시간 이상 입구에서 기다린 끝에 이루어졌다. 지난해까지는 없던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국가보호구역이라서 입장이 안 되는 곳으로 출입하려면 여권과 비자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행의 여권은 모두 숙소에 맡겨두고 온 터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난해 기행단은 이곳을 자유롭게 방문했었는데 올해는 출입이 까다롭게 하고 있었다.
다행히 현지 공안이 우리말을 쓰는 동포라서 충분한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다.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자, 그분들이 나서서 상부에 보고하고 기다린 끝에 한 시간 여 만에 들어갈 수 있었다. 화룡시에서 청산리로 들어오는 초입에도 공안이 따라와 검문을 했었는데, 오늘 청산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한 하루였다.
특히, 이곳은 충남 홍성 출신의 김좌진 장군을 기리는 충남교육청 소속 학생들이 꼭 방문하는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저녁 늦은 시간에 도착한 기행단은 대첩비에 헌화와 묵념을 하고 인솔교사의 청산리 전투와 이 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저무는 해를 뒤로하고 다시 연길로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