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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흥사단 건물 앞의 송종익 흉상
 대구 흥사단 건물 앞의 송종익 흉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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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범어동 222-8 흥사단 회관 앞에 송종익(宋鍾翊) 흉상이 세워져 있다. 특히 이 건물 2층에는 '우강헌(友江軒)'이라는 이름의 송종익 전시 공간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이는 우강 송종익이 1913년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체 흥사단의 주요 활동가이거나, 또는 대구가 낳은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해준다.

흥사단 창립시 경상도 지부장을 역임한 송종익은 1886년 대구에서 태어나 1956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구에 머물 때는 1907년에 결성된 대동 광문회(大東廣文會)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그 후로는 주로 미국에서 독립 운동에 매진했다.
광문회


광문회에는 1910년 최남선 등이 고문헌의 보존과 간행 등을 목표로 설립한 '조선 광문회(光文會)'와 1907년 대구에서 창립된 애국 계몽 단체 '대동 광문회(廣文會)'가 유명하다. 흔히 '대구 광문회'라 부르는 대동광문회는 금연으로 국채를 갚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선도한 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티븐스 사살 독립투사 후원 활동

송종익의 초기 활동 중에는 일제 통감부의 외교 고문으로서 자기 나라인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한국에도 매우 이롭다' 등의 망언을 일삼아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분을 샀던 스티븐스를 1908년 전명운, 장인환 두 지사가 샌프란시스코까지 찾아가 사살했을 때 재판 후원 재무로 선임되어 활동한 일이 손가락에 꼽힌다.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 장인환 지사(대구 광복회관 전시 사진)
 스티븐스를 사살한 전명운, 장인환 지사(대구 광복회관 전시 사진)
ⓒ 대구광복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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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송종익은 '1945년 광복 때까지 미주 지역에서 한인 사회의 안녕과 권익 보호를 위해 활약하였고,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에서 주로 재정을 담당하면서 살림을 도맡았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맡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해방 후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면서 한인 사회를 위해 일하다가 1956년 1월 7일 신병으로 별세했다. 1995년 8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며, 1996년 10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 안내 책자의 표현).' 좀 더 자세한 공적을 알아보기 위해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송종익 지사 '공적 내용'을 읽어본다.
 
"대구 사람이다. 1906년 4월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하고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의 회원인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양 의사의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고 재무로 임명되어 양 의사의 재판 후원 및 후원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 과정을 '독립 재판(獨立裁判)'으로 전개하는 등 재판과정을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구미 각국에 널리 인식시켰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 장래에 동량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해 홍언 등 8명의 창립발기위원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하는 한편, 후일 흥사단 이사부장을 역임하였다. 1917년 1월 안창호와 함께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조직하고 주금(株金) 9만 5천 달러를 모집하여 쌀농사를 지어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27년 문을 닫고 말았다. 또한 1932년 1월 재차 흥업회사를 조직하여 재원 확보에 노력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송종익 지사 흉상 뒤로 대구 흥사단 건물이 보이는 풍경
 송종익 지사 흉상 뒤로 대구 흥사단 건물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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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대한인국민회 재무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송금하는 한편, 1936년 5월 분열된 북미지역 한인민족 운동단체의 부흥을 위해 소집된 각 지방 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그는 각 단체를 통합해 북미 대한인국민회를 재조직하는 한편, 미주 한인 사회의 부흥과 항일운동, 임시정부의 재정 후원을 도모하였다. 또한 회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추진된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어 1938년 4월 총회관을 낙성하는 데 헌신하였다.

1939년 중국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 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그를 비롯한 북미 대한인국민회 임원들은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 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했다.

한시대 등과 함께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한 그는 동 대회의 선언문과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작성하여 독립전선 통일문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봉대(奉戴, 받들어 모심) 문제, 대미 외교기관의 설치 문제, 군사운동에 관한 문제, 미국 국방공작 후원문제, 연합기관 설치문제, 독립금 수봉문제 등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고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설치되자,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194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부의장,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 겸 재무로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송종익 약력 (대구흥사단이 주관한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의 소형 홍보물에 수록된 내용)
 송종익 약력 (대구흥사단이 주관한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의 소형 홍보물에 수록된 내용)
ⓒ 대구경북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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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탈퇴한 후 1944년 6월 독자적으로 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 별도의 외교사무소를 개설하고 외교사무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동년 8월 외교위원부를 새롭게 개조할 것을 명령하자, 그 해 10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과 하와이의 17개 단체 중 동지회 계열의 4개 단체를 제외한 13개 한인단체가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 대표원으로 참석한 그는 개조된 주미 외교위원부의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그 해 10월 조국의 재건을 후원할 목적으로 구성된 재미 한족 국내파견 대표단(在美韓族國內派遣代表團)의 재무로 선임되어 고국을 떠나온 지 40여년 만에 조국의 땅을 밟았으나, 당시 해방 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미주 한인의 독립공채 발매 광경(대구경북흥사단이 주관한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의 소형 홍보물에 실린 사진)
 미주 한인의 독립공채 발매 광경(대구경북흥사단이 주관한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의 소형 홍보물에 실린 사진)
ⓒ 대구경북흥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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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건물 내 우강헌을 둘러보고 나와 다시 송종익 지사의 흉상 앞에 선다. '고국을 떠나온 지 40여년 만에 조국의 땅을 밟았으나, 당시 해방 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라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내용이 재삼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40여 년만에 귀국했건만 왜 해방 정국은 그토록 혼란해서 생애를 바친 독립지사를 나라 안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흉상 앞에서 서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시각에 그의 마음을 지배했을 허망함을 되새겨본다. 독립지사의 후대 사람들인 우리는 앞으로 통일을 이루고, 터무니없는 지역감정을 해소하여 선열들이 그렸던 나라를 세워야 할 것이다. 그때면 송종익 지사는 영혼으로나마 이 땅을 다시 찾으리라.

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 및 <국채보상운동 111주년 기념 전시회> 소형 홍보물 참조



태그:#송종익, #광문회, #흥사단, #독립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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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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