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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안보와 평화를 빌미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드 배치에 저항하는 소성리 주민들, 제주해군기지 건설로 고통받는 강정마을 주민들, 평택 미군기지 확장으로 평생을 일궈온 삶터를 빼앗긴 대추리 마을 주민들.

대추리 강제이주 11년, 완전히 변해버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가 염원하는 평화가 허울뿐인 것이 아니길 바란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는 정부가 약속했던 합의사항을 이행하기를 바라며, 대추리 강제 행정대집행이 진행된 2006년 5월 4일을 앞두고 대추리 주민들의 삶을 '끝나지 않은 대추리 싸움'으로 연재한다... 기자 말

행정구역 상 노와리 이주단지인 이곳은 대추리 주민들의 새로운 집이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대추리 이주단지 행정구역 상 노와리 이주단지인 이곳은 대추리 주민들의 새로운 집이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심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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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내가 지은 집이지만, 낯설어."

무심한 듯 내뱉은 한숨이 온 방을 가득 채운다. 평택 대추리 마을 주민인 송재국님이 들려주신 근황 중 한마디가 나를 멈칫하게 했다. 작년에 평택 평화센터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구술작가학교에 함께 하면서 나는 여러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추리에서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어도 들어가면 온화하고 포근하고 그랬어. 그런데 여기 와서 누워있으면. 이게 내 집인가…. 진짜 이게 내 집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 여기 와서 살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여. 정말 이렇게 끝까지 이렇게 살다 죽나."

그의 집은 깔끔한 목조 주택으로 거실도 넓고 깨끗했다. 그냥 보면 쾌적해 보이는 그곳에서 이렇게 지내셨구나. 2007년 농사짓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지 10년이 지났는데,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떤 마음인지 참 무심했구나.

며칠 전에 평화센터 2층에서 마을을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눈 홍광유 님도 비슷하게 말했다.

"대추리에 살 적에는 한집에 사는 것 마냥 (남의 집에) 불쑥 들어가기도 하고 농담도 잘하고 했었는데. 남의 집에 일을 하러 많이 다녔다고. 그런데 지금 할 일이 없으니께 남의 집 가도 할 얘기가 없잖아. 그때 당시에는 '내일 나 논 좀 매줘' 하고 서로 품앗이도 하고, 그 집 가서 일도 하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그게 없으니까 ……."

대추리 주민이 잃어버린 것은 땅만이 아니었다. 삶의 터를 빼앗겼으니 삶도 삐끄덕거릴 수밖에 없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의 속내

지난 2007년 2월 이뤄진 주민-정부 간 이주 합의에 따라 3월 말까지 이 마을을 떠나야 하는 경기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이 3월 24일 대추리 농협창고에서 마지막이 될 935번째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날 문화제에 참석한 문정현 신부와 마을 주민들이 무대에 올라 감사인사를 전하고 있다.
 지난 2007년 2월 이뤄진 주민-정부 간 이주 합의에 따라 3월 말까지 이 마을을 떠나야 하는 경기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이 3월 24일 대추리 농협창고에서 마지막이 될 935번째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이날 문화제에 참석한 문정현 신부와 마을 주민들이 무대에 올라 감사인사를 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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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건물만 보고 삶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미군기지 확장 때문에 대추리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후 어떻게 지내는지 속내도 모른 채 잘 산다고, 잘 된 거라고 오해를 하곤 한다. 대추리 이주단지 평화마을은 주민이 직접 집을 새로 지었는데 겉으로 보기에 참 아름다운 전원주택단지다.

작년에는 어떤 사람이 사드 반입을 막기 위해 소성리에서 싸우는 주민들을 비판하며 대추리 평화마을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는 소성리 주민들은 평택 대추리 주민처럼 정부정책을 따르라고 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정부 말대로 해서 정부가 이렇게 예쁜 집도 지어주고 잘 살고 있는데 소성리 주민들은 왜 반대하냐는 것이다.

속에서 열이 났다. 집을 지은 돈도 주민의 돈이며, 무엇보다 쫓겨난 후 주민의 삶은 흔들렸다. 정부의 회유와 이간질 덕에 마을 주민들도 이리 저리 나뉘어졌다. 대추리에서 쫓겨난 후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다며 일그러지던 신종원 이장님의 표정도 떠오르고, 2007년 대추리 마을을 떠나며 우느라 말도 잇지 못하던 방승률 노인회장님의 눈물도 떠올랐다. 무엇이 나아졌다는 것일까.

고요한 죽음은 평화가 아니다. 평화란 자기 삶을 훼손당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 때 솟아오르는 생동, 생명이다. "여기서 쳐다보면 평화로운 마을 같잖아요. 도로도 깨끗하고 집도 예쁘고.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라는 홍광유님의 말이 귓가에 웅웅 대는 까닭이다.

그리운 내 고향

2006년 9월 미군기지 확장 예정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 국방부의 강제철거가 집행되면서 마을 전체는 폐허로 변했다. 그나마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 쪽으로는 철거건물 잔해가 넘어가지 않도록 반쪽만 무너뜨려 그 모습이 흉측하기 그지없다.
 2006년 9월 미군기지 확장 예정지인 경기도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 국방부의 강제철거가 집행되면서 마을 전체는 폐허로 변했다. 그나마 주민들이 살고 있는 집 쪽으로는 철거건물 잔해가 넘어가지 않도록 반쪽만 무너뜨려 그 모습이 흉측하기 그지없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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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땅도 잃고 농사일도 잃었다. 나라가 당신을 실업자로 만들었다는 홍광유님과 일할 수 없으니 수입이 하나도 없다는 송재국님에게 농사는 삶의 엔진이었다. 농사지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고, 이웃주민과 어울릴 수 있었고 농사짓는 땅에 곡식에 기댈 수 있었다. 송재국님은 "넓은 들에 심은 곡식, 벼가 크고 가을엔 또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이는 그 모습"을 죽어도 못 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은 평택 대추리에 있던 148가구가 4개 작업반으로 나누어 함께 농사를 지었던 때, 품앗이를 하고 운동회를 하며 어울리던 때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지키고 싶었던 삶이다. 끝까지 싸우던 44가구가 평택 노와리 대추리 평화마을로 함께 이주한 것은 함께 한 마을 주민이 지지대임을 알아서다. 흔들리는 삶을 지탱하는 지지대. 고추가 잘 자라도록 지지대가 되어준 이웃들…….

홍광유님은 가끔 예전 살던 곳을 지나면 "둑 너머로 마을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도 자꾸 쳐다봐진다"고 했다. 자꾸 살피고 싶어진다고. "살던 데가 조그만 야산도 전부 깎아서 평지라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몰라요. 그저 그쪽에는 대추리 우리집이 있었겠구나 생각만 하지." 쓸쓸한 마음과 허무한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벌판을 지날 때면, "아유, 저걸 농사지으면 밥이라도 먹고 살 텐데"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운 그 시절로 가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하셨다.

송재국님이나 홍광유님 등 마을주민들은 더는 고향을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07년 2월 정부대표와 주민대표가 합의할 때 주민들의 핵심 요구사항은 '대추리 명칭 사용'이었다. 대추리에서 쫓아내면서 노와리 이주단지에 모여 살면 행정명칭을 바꿔서 '대추리'라는 마을 명칭을 주겠다고 정부는 약속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평택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지방자치법 4조의 2, 4항에도 '행정능률과 주민 편의를 위해' 동이나 리를 설치하도록 하기 때문에, 노와이주단지를 '대추리'로 명칭을 바꾸는 법적 근거도 있다. 하지만 평택시는 노와리 전체 주민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어 대추리 주민들은 결국 2017년에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그저 약속을 지켰다면 소송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제 또 주민들은 소송결과에 마음을 졸이고 있다.

함께 이주한 사람들이 나이 들어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는데 마을 이름이라도 빨리 되찾고 싶다는 마을 주민들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황새울 들판을 떠날 때 흘렸던 눈물을 주민들이 더는 흘리지 않게 정부는 이제라도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는 지난 2014년 6월 구성된 이래, 인권현장의 목소리를 개인의 고통이나 기억이 아닌 사회적 고통과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평택미군기지 확장 정책에 따라 삶의 터전에서 내몰린 대추리 주민들의 생애구술사 작업을 해오고 있다.



태그:#대추리 강제이주 11년, #대추리 마을 이름, #평화, #미군기지 확장 강제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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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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