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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풍덩 빠진 봄
 저수지에 풍덩 빠진 봄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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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꽃 피는 우물가, 동네 처녀들 물동이 내던지고 바람나는 4월이다. 봄이 농염하게 무르익어 가고 있다. 어찌 동네 처녀들 뿐이랴. 섬진강 시인 김용택도 봄바람 못 이겨 텃밭에 흙 묻은 호밋자루 내동댕이쳐 놓은 채 예쁜 여자 손목 잡고 섬진강 봄물 따라 매화꽃 구경 가는 '봄날'이다. 만물이 소생하니 화란춘성(花爛春盛)이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다. 바야흐로 상춘 지절(常春之節)이다.

여기저기서 진달래 축제다, 벚꽃 축제다, 하며 야단 법석이다. 온갖 꽃들이 동시에 올라오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봄바람에 취해 꽃에 취해 들로 산으로 나간다. 꽃 반 사람 반이다. 유난히 춥고도 어두웠던 겨울의 터널을 지나온 탓 일 게다.

진달래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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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꽃구경은 봄놀이 중 으뜸이 아니었던가 싶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석양 중에 피어 있고, 푸른 버들 향기로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구나. 칼로 새겼는지 붓으로 그렸는지 조물주의 신통한 조화 물물(物物)마다 희한 쿠나"라고 봄을 노래한 가사(歌辭)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집안에 갇혀 온갖 가사에 시달리던 아낙네들도 청명(淸明) 무렵이 되면 술과 음식 장만하여 화전놀이를 즐기며 지친 심신을 달랬다.

복숭아 꽃
 복숭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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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삼간 지어 놓고 풍월주인 되리

지금으로부터 약 530여 년 전 조선 전기, 번거롭고 어지러운 속된 세상 정쟁(政爭)에 부대끼며 살다 지쳐, '붓자루' 내던지고 낙향하여 봄노래 부르며 유유자적 풍월주인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살다 간 로맨티스트가 있었다.  

'근심 걱정 없는 집'에 산다는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이다. 정극인은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어 태학(太學)에 나갔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의 중건 사업을 시행하려 하자 이의 부당함을 알리려 태학생들의 권당(捲堂),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세종의 진노를 사 귀양살이를 한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처가(妻家)인 태인,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으로 내려와 초가삼간을 짓고 '불우헌(不憂軒)'이라 이름 지었다. '세상만사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꽤 진보적 사상을 가진 문인이었던 것 같다.

생원이 된 후 여러 번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1453년(단종 1) 비로소 과거에 합격했다. 그의 나이 53세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나이 제한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재직 중,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내던지고 태인으로 돌아온다. 다시 출사 하였다가 성종 1년인 1472년에 완전히 은퇴하여 태인으로 돌아와 '상춘곡(賞春曲)'을 부르며 안빈낙도하며 살아간다.

생강나무 꽃
 생강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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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던 주군이 폐위당하자, 태인으로 퇴거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눈에 보이는 봄날의 풍경은 절실했을 것이다. '불우(不憂)', 걱정이 없는 게 아니라, '망우(忘憂)', 걱정을 잊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잊기 위해 '찬란한 봄'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사문학의 효시로 주장되고, 훗날 송순(宋純)의 '면앙정가'로 이어져 강호가도(江湖歌道)라는 시풍을 형성했다는 불우헌의 <상춘곡>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약 40여 년 전 봄날 국어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정극인 할아버지는 왜 이런 어려운 글을 써서 시험에 들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다소 엉뚱한 원망을 했던 추억이 새롭다

다시 읽어 보는 상춘곡은 오늘날,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풍류의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복숭아꽃 살구꽃은 석양 중에 피어 있고
 복숭아꽃 살구꽃은 석양 중에 피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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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행락 이만하면 족하지 않은가

불우헌은 상춘곡 서사에서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한가. 옛사람의 풍류를 따를까, 못 따를까. 세상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 나와 같은 사람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사는 자연의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이냐"라고 나무라고 있다.

그래, 풍류와 자연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유명 꽃 축제를 찾는 것도 좋지만 몰려드는 인파들과 교통체증으로 춘흥(春興)이 깨지기 쉽다. 봄을 속속들이 즐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까운 산을 찾는 것이 좋다.

호젓한 낮은 산등성이 소나무 사이 좁은 길에 드문드문 피어있는 진달래며 산 벗꽃, 생강나무 꽃으로 이어지는 숲 속 꽃길은 홍진에 썩은 폐부를 씻겨준다. 온갖 새들의 지저귐에는 관능이 묻어 난다.

"수풀에 우는 새는 춘기(春氣)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 / 물아일체(物我一體) 어니 흥(興)이야 다를소냐."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수 놓고 먹으리라"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수 놓고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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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허기 지면 가져온 도시락 꺼내놓고 막걸리 한 잔씩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를 세가며 마시면 화창한 봄바람에 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 담기리라. 이보다 나은 상춘이 어디 있으랴.

"갓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노코 /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 화풍(和風)이 건닷 부러 녹수(綠水) 건너오니 /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불후헌의 봄노래처럼 "공리와 명예도 나를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어떤 벗이 있겠는가?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허튼 생각을 아니하네. 아무튼 한평생 즐겁게 지내는 일이 이만하면 족하지 않겠는가?" 세상살이 팍팍하고 삶이 풀리지 않더라도, 이 화창한 봄날 하루쯤 산수를 벗삼아 근심 걱정 잊어 보는 건 어떨까. 연분홍 치마 휘날리는 봄날이 가고 있다. 다시 못 올 청춘도.


태그:#상춘곡, #불우헌 정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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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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