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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저항했지만 속옷은 곧 벗겨졌다.
권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난폭하게 내리누르고
성기를 강제로 밀어넣으려고 했다......
그녀 인생 최초의 강간이었다."
- 정이현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중 '트렁크' 58~59쪽 발췌

정이현의 소설 '트렁크'에 나오는 장면이다. 성공을 삶의 목표로 두고, 최선을 다해 커리어를 쌓아온 여성 차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소설 속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오로지 '그녀'라고만 지칭되며 그녀의 내면만이 기술될 뿐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세상을 관찰하며 성공할 자와 성공하지 못할 자, 혹은 성공에 필요한 자와 필요 없는 자, 아니면 성공한 자와 성공하지 못한 자를 가려내며 대하고 만난다.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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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회사의 권 이사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 권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는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다. 그녀와 권은 요즘 관계가 삐걱거리는데, 그녀가 회사의 CEO로 부임한 브랜든과 핑크빛 기류를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연의 관계란 참 이상한 것이라서, 권은 여기에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구속하려 든다. 권은 자신이 이미 가정을 배신했다는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소설은 그녀의 트렁크에서 회사의 아르바이트생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언제부터 시체가 거기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는 신고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그녀가 애써 쌓아올린 자신의 커리어를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그래서 그녀는 권을 불러내어 시체를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권은 자신의 등골을 빼먹은 것도 모자라서 내게 이런 일까지 시키려 드느냐면서 분노하고 우발적으로 그녀를 강간한다.

소설 속에서 강간 장면은 굉장히 드라이하게, 그러나 제법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모욕을 견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강간이 끝난 직후, 그녀는 방안에 있던 무거운 크리스탈 꽃병으로 권의 머리를 내리쳐서 권을 죽여 버린다. 건조하고 분노스러웠던 강간이 지나자마자 이어지는 복수 장면은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카타르시스마저 안긴다.

미투 운동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았던 여성들은 대부분 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들을 털어 놓았다. 젊고 약했을 때 어쩔 수 없이 겪었던 성폭력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그들에게 왜 이제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그때엔 왜 말할 수 없었나를 묻는 것은 또 다른 분노를 자아낸다.

'트렁크'를 읽고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란 의문을 품고 기존에 나온 평론들을 찾아서 여러 편 읽어 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믿을 수 없는 구절을 발견했다. '그녀는 별 뚜렷한 동기도 없이 권을 살해해 버린다'라고 씌인 평론을 읽고서, 누군가는 강간이 살해의 동기가 될 정도의 폭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살해가 동기로 인해 정당화되어선 안 되지만, 일반적으로 살해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간주되는, 돈 문제나 관계에서 오는 갈등에 비해 강간이 별 큰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뉘앙스로 읽혀서 적잖이 당황했다.

성폭력을 경험했던 여성들은 대부분 할 수만 있다면 상대에게 응징을 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먹질을 할 수 있다면, 똑같이 때릴 수 있다면, 무릎 꿇릴 수 있다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대를 막 대하는 얄팍한 상대를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리적 힘과 사회적 영향력을 동시에 써서 자신에게 성폭력을 가한 상대에게 작게는 사과 받고 싶고, 크게는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이현의 그녀가 '트렁크'에서 내리친 크리스탈 꽃병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대리 응징으로 읽혔으면 좋겠다. 그녀는 죽어 버린 권을 '트렁크'에 넣고 일터로 나간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모를 열린 결말로 소설은 끝맺고 있지만, 이번 미투 운동이 상처 입은 이들에게 그들의 아픈 기억을 담는 '트렁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미투 운동을 통해 엄준하게 비겁한 가해자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성폭력을 행하다가는 죽어서 '트렁크'에 갇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숨이 끊어져야 꼭 죽는 게 아니다. 이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사회적 매장 역시 참혹한 죽음이다.

추악한 가해자들이 사회라는 큰 감옥에서 가족에게, 지인에게, 익명의 다수에게 비난과 수모를 당하는 형벌에 처해지길 바란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달래질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네이버 개인 블로그 '자유로운 영혼, 시름 잊은 나들이' 에도 실린 글입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2003)


태그:#정이현, #미투, #트렁크, #위드유, #WITH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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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가, 임학박사, 연구직 공무원, 애기엄마. 쓴 책에 <착한 불륜, 해선 안 될 사랑은 없다>, <사랑, 마음을 내려 놓다>. 연구 분야는 그린 마케팅 및 합법목재 교역촉진제도 연구. 최근 관심 분야는 환경 정의와 생태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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