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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책도 읽고 무더위도 피할 겸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이라는 새로운 책 세상을 만났다. 언뜻 보면 만화책과 흡사한데 풍부한 예술성과 문학성을 갖춘 만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어른을 위한 만화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무더위 속에서 단 하루 만에 읽어낸 이 책 <아이언 크로즈>(Iron Crows)도 그래픽 노블이다.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 치타공에서 수명이 다한 폐선박들을 하나하나 자르고, 부수고, 녹여 맨손으로 해체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노동현장이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참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장이지만 저자는 노동자들의 고된 삶을 신성한 노동이니 하는 말로 미화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정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원작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2009년 한국 최초로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중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제목 '아이언 크로즈'는 철까마귀를 뜻하는 것으로 폐선박들이 해체되는 마을에 사는 까마귀의 삶이 책 말미에 등장한다.

'신이 내린 선물'이 된 대형 폐선박

 책표지
책표지 ⓒ 서해문집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대형선박 해체라 상상하지 못한 일은 남부의 항구도시 치타공이라는 해변 마을에 그야말로 우연한 운명처럼 다가왔다. 1965년 강력한 폭풍우가 치타공 해안을 강타하면서 그리스 선박 한 척이 해변에 좌초하게 된다. 이 배는 얼마간 방치되다가 급조된 선박 해체 업체에 의해 해체된다. - 본문 가운데 

이때부터 방글라데시 선박 해체 산업이 시작된다. 철광석이 전혀 매장되어 있지 않은 방글라데시에 거대한 고철덩이인 폐선박은 '신이 내린 선물'로 변신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범람 지대라 철광석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 이 나라에서 이 고철은 소중한 자산이 된다. 방글라데시는 철강의 약 60%를 치타공에 있는 선박해체소에서 공급받을 정도다.

해체된 선박은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철강, 가구, 생활용품의 모습으로 전국 곳곳에 팔려나간다. 심지어 폐선에서 흘러나온 기름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노동자들이 손으로 쓸어 모아 판매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오로지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가난이 만들어낸 '완벽한 재활용'이라 표현한다.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면서 치타공은 전 세계 선박 해체 산업의 중심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박해체소는 지금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데, 현재 100여 개 사업장에서 5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직접 고용되어 있다. 연관된 사업(제련소, 재활용 가게 등)까지 포함하면 약 15만 명이 선박해체산업으로 먹고산다고.

저자는 치타공의 풍경은 비현실에 가까웠다고 토로한다.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는 녹슨 대형 선박, 연기를 타고 코를 찌르는 기름과 폐기물로 뒤덮인 작업장, 가파르게 솟은 철판에 맨몸으로 위태로이 붙어 있는 노동자들의 육체와 그들의 쩍쩍 갈라진 맨발과 어깨에 깊이 팬 상처'.

저자가 고백했듯 지면에 그대로 담아내려는 시도가 욕심으로 느껴지는 현장이 책속에 펼쳐진다. 한 노동자의 말에 의하면 치타공 해안의 선박해체소에서는 매년 2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다.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힘들고 위험한 노동을 어떻게 견뎌내느냐 물었을 때 저자는 이런 대답을 듣게 된다.

"이 일은 신이 주신 선물이고,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오. 이 낡은 배와 함께 살아가는 거지. 이게 우리가 가진 전부니까." 

폐선이 신이 내린 선물이 될 정도로 이 나라의 빈곤은 극심한 실정이다. 심지어 10대 초반의 어린 아이들도 불법을 감수하고 일을 하러 올 정도다. 버려진 대형 선박을 해체하는 일이 이들에겐 가난과 운명을 벗어나기 위한 목숨 건 투쟁이구나 싶었다.

그곳에는 철까마귀가 산다

 철사를 물어와 둥지를 틀고 알까지 낳은 치타공의 철까마귀.
철사를 물어와 둥지를 틀고 알까지 낳은 치타공의 철까마귀. ⓒ 서해문집

'치타공 해변을 처음 목격했던 그 순간의 느낌이 지금도 선연하다. 갯벌 위에 유령처럼 서 있던 수많은 폐선박들, 기름을 태우는 연기와 폐기물로 뒤덮인 작업장, 노동자들의 쩍쩍 갈라진 맨발과 어깨에 깊이 팬 상처···세상에서 가장 보기 힘든 이런 장면은 참혹했고 강렬했다.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한 사람도 찡그리는 이가 없었다. 단순하고 순진한 노동자들, 카메라만 대면 모두가 웃는다. 그리고 하루 1~2달러를 벌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며 거대한 폐선을 뚜벅뚜벅 잘라낸다. 이곳 노동자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 본문 가운데

깎아지른 절벽에서 외줄 하나에 매달려 석청을 따는 사람, 남태평양에 나가 대왕오징어와 육탄전을 벌이며 살아가는 페루 어부들이 나오는 EBS 다큐멘터리 <극한직업>을 즐겨보지만, 선박 해체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냥 힘든 직업이지 싶다. 그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참혹한 노동현장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믿을 수 없게 선한 웃음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치타공엔 이 책의 제목이 된 까마귀가 많이 산다. 마을 사람들은 그냥 까마귀가 아니라 철까마귀(아이언 크로즈)라고 부른다. 이유는 놀랍게도 철사를 물어 와서 둥지를 짓고 푸른빛을 띤 알까지 낳아서다. 철사로 지은 둥지가 안락하지 않다는 것을 까마귀인들 모를 리 없으리라. 이곳의 착한 노동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존재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린피스(국제 환경단체)가 된 사연도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일반책의 두 배 크기라 그림들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책장을 넘기다보니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수 십 년 간 많은 국민들이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일을 하는데 방글라데시 정부는 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까? 이 나라는 왜 오래도록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어떤 이는 매년 발생하는 태풍과 홍수로 인해 농사를 짓기 힘들어서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과거 우리나라 모습과 비슷하다. 부패한 정치 구조와 토호들의 가문 정치, 세습 정치가 만연한 탓에 극소수의 지주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고, 다수의 농민은 대대로 가난한 소작농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치타공 사람들을 생생하게 담아낸 '그래픽 노블'.
치타공 사람들을 생생하게 담아낸 '그래픽 노블'. ⓒ 서해문집

덧붙이는 글 | 박봉남(원저) 김예신 (그림) | 서해문집 | 2017-07-15
제 블로그(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



아이언 크로즈 Iron Crows - 배들의 무덤, 치타공의 철까마귀

김예신 글.그림, 박봉남 원작, 서해문집(2017)


#아이언크로즈#방글라데시#치타공#박봉남#김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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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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