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고 장재인 유고시집 재발간 기념 추모제
고 장재인 유고시집 재발간 기념 추모제 ⓒ 심규상

25년 전인 1990년 9월 1일 여주 섬강교에서 사고가 일어났다.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 26명 중 23명이 숨졌다. '세월호 참사'와 꼭 닮은 인재였다.

공주대 출신 장재인씨의 부인과 아들도 그 날 숨졌다. 보름 뒤인 15일 새벽, 장재인씨는 부인과 아들의 장례 준비를 마친 뒤 가족들 곁으로 영영 떠났다.

고 장재인씨는 당시 시인이자 서울 덕수상고 교사였다. 하지만 유품은 그가 쓴 수십 편의 시가 전부였다. 공주대 재학 때에 직선 총학생회장으로 정의를 외치며 맨 앞줄에 섰다가 감옥에 갇히고 강제징집까지 당했지만 발자취마저 세월 속에 묻혔다.

당시 그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유고시집을 펴냈다.

그로부터 꼬박 25년이 흘렀다. 공주대 동문(영어교육 78)과 공주대민주동문회가 그의 유고시집('그대여 여기는 지금 어디쯤인가')을 오는 15일 재출간하기로 했다. 또 조출한 추모제도 마련했다.  유고시집 재발간 기념 추모제는 오는 9일 오전 11시 남한강공원묘원 장지(경기도 여주시 가남읍)에서 열린다.

한기호 추진위원장은 "그를 기억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추모제 참여는 물론 유고시집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다음은 고 장재인 시인의 친구인 신현수 시인의 회고 글이다.

오늘, 9월 15일은 사랑하는 내 친구 장재인이 죽은 지 꼭 25년 되는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90년 9월 1일에 여주 섬강교 사고가 일어났고, 버스에 타고 있던 26명의 승객 중 23명이 죽었다.


사망자 중에는 사랑하는 내 친구 장재인의 아내 최영애와 그의 외아들 장호도... 있었다. 영애는 5일 만에 발견됐고, 장호는 13일이 지나 지나서야 강화도 주문도에서 한 어부에 의해 발견됐다. 그리고 사고로부터 보름이 지난 15일 새벽 4시, 재인이는 아내와 아들의 장례 준비를 모두 마쳐 놓고 아내와 아들 곁으로 갔다. 돌아보면, 섬강교 사고는 사고 후 처리과정이 세월호를 빼다 박았다.

재인이는 대학 시절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80년대 초 잠시 민주화의 봄 때 공주대 직선 총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역사를 앞장서다가 그 이후의 모든 삶이 핏빛 비수로 되돌아왔다. 1년간 감옥을 다녀왔고, 강제징집으로 3년간 군대에 갔다 왔다.

복학해 간신히 졸업은 했지만 보안 검열 때문에 발령은 나지 않았다.학원 강사 월부책 장사 등을 전전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87년 9월에 서울 덕수상고로 발령이 났고, 영애는 89년 3월에 홍천군 내면고로 발령이 났다. 주말부부 생활 이었지만 재인의 삶에서 처음으로 행복감을 맛보던 때였고,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이미 선생을 비롯해 모든 기득권을 다 누렸으면서 당시 역사에서 잠시 비켜선 재인을 불편해 했었으며, 이미 그는 이 세상에 없어 용서를 구할 수도 없다.

나는 몇 달 전 무엇에 홀린 듯 재인이 유고시집도 꺼내 보고, 그때 내가 시집에 쓴 발문도 다시 읽어 보고, 보관하고 있던 당시 신문기사도 꺼내 보고, 급기야 유서도 꺼내 들었다. (유서를 내가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재인이를 역사에 다시 호명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친구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말이다. 재인이는 대학노트 한권 분량의 시를 남겼고, 1991년 대학 선배 한기호형이 앞장서 그의 유고시집 <그대여 여기는 지금 어디쯤인가>를 펴냈다. 장재인시인, 이라고 쓰니 눈앞이 다시 흐려진다.


#유고시집#고 장재인 시인#공주대민주동문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