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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 색깔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녹색에서 황금색으로. 들녘에도 손님처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나락 모가지 올라온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낱알이 굵어지고 색깔이 달라졌습니다. 순식간에 피어난 벼꽃은 제꽃가루받이로 수정을 끝낸 뒤, 토실토실 알찬 알갱이로 여물었습니다. 제 일을 스스로 알아서 착착 진행해 우리에게 귀한 식량을 내어주는 자연이 참 고맙습니다.

들판에는 풍요로움이 시작되었다

가을 들길은 풍요로움으로 넘쳐납니다.
 가을 들길은 풍요로움으로 넘쳐납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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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색깔로 단장한 벼 이삭은 낮은 곳을 향하여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들에게 겸손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가르쳐줍니다.

들길 자전거를 타다 동네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 벼가 벌써 누래졌어요!"
"그럼. 백로(白露)가 지나면 논의 벼가 누래지지!"
"추석 때 햅쌀 먹겠는 걸요!"
"올핸 윤달이 들어 늦은 추석 때문에 햅쌀로 차례 지내고말고!"

이른 아침에 들녘을 바라보는 구릿빛 농부의 얼굴이 빛나는 아침 햇살만큼이나 건강해 보입니다.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였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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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말이야! 이맘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벼 익는 소리가 들리거든. 그 소리를 들으면 애써 가꾼 것에 대한 보람 같은 게 느껴지지! 자전거 타면서 벼 익는 소리는 못 들었나?"

아저씨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아뇨! 못 들었는걸요."라고 웃음으로 답합니다.

"우린 벼 익는 들녘에 서면 어제 소리, 오늘 소리가 다르게 느껴지는걸!"
"설마요?"
"마음으로 듣는다는 소리야!"
"저는요. 곡식 익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들판에서 가을 냄새는 맡아지는 걸요."
"그럼 됐어! 시골 살 자격이 있구먼!"

시골에서 살 자격이 있다는 말씀에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떤 논은 벼가 쓰러진 데가 있어요?"
"혹간 쓰러지기도 하지! 그런데 그건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러온 거야!"
"왜요?"
"좀 많이 먹겠다고 이삭거름 세게 주면 쓰러지는 수가 있어!"

아저씨는 자기네 논은 멀쩡하지 않느냐면서 거름도 때맞춰 적당히 줘야 탈이 없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줍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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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들판을 자주 들락거려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이삭 팰 때는 양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삭 패는 시기를 눈여겨보고, 작황에 따라 비료를 적당히 뿌려주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다가 때를 놓쳐 비료를 지나치게 많이 주면 이삭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지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도의 기술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야기 끝에 아저씨가 볏논을 가리키며 묻습니다.

"이게 무슨 꽃인 줄 아남?"
"벗풀 아녀요?"
"벗풀을 다 아네! 잎사귀가 등잔걸이 같지? 그래서 여기선 벗풀을 '등잔걸이'라 불러!"
"어느 곳엔 보라색 꽃이 보이던데, 그건 뭐죠?"
"자세히도 보고 다니는구먼! 물옥잠화를 본 것 같네!"

아저씨는 예전엔 논에 자라는 풀들이 꽃이 피게 놔두지를 않고 김을 맸는데, 요즘 농사꾼 논에는 여러 들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벼논에 핀 하얀 벗풀. 잎사귀가 활살촉 같습니다.
 벼논에 핀 하얀 벗풀. 잎사귀가 활살촉 같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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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란색 물옥잠화가 벼논에 피어났습니다. 요즘 벼논에서 많이 목격됩니다.
 보란색 물옥잠화가 벼논에 피어났습니다. 요즘 벼논에서 많이 목격됩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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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손을 피해 간 하얀 꽃 벗풀과 보라색 물옥잠화가 참 예쁩니다. 비록 논에 난 잡초이지만요.

농부의 마음에도 풍년이 들었으면

아저씨는 푸짐하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어릴 때 추석을 손꼽아 기다렸지? 추석빔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햅쌀로 지은 하얀 쌀밥을 먹고 싶어서였을 거야. 우리 부모님께서는 땀을 쏟아낸 결실로 식구들이 배불리 먹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 쌀밥을 먹는다는 것, 그건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야! 좋은 볍씨를 고르고, 모를 내고, 김을 매고... 정성으로 가꿔야 풍성한 가을을 맛보는 것이지! 쌀 귀한 줄 모르는 요즘 사람들이 그걸 알기나 하는지!"

들녘의 색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가을색이 완연합니다.
 들녘의 색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가을색이 완연합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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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알곡. 우리의 소중한 식량이 될 것입니다.
 알찬 알곡. 우리의 소중한 식량이 될 것입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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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이야기 끝에 내가 물었습니다.

"아저씨 다른 덴 몰라도 우리 동네는 올해도 풍년이겠어요?"
"그래, 풍년이지!"
"풍년이 들면 마음도 넉넉하죠?"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뒤이어 이어지는 아저씨 말씀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습니다.

"근데 말이야! 풍년이면 뭐해? 쌀값이 좀 올라야지! 쌀 재고량이 너무 많아 풍년이 들어도 제값을 못 받게 생겼으니 농사꾼 시름이 많다고! 남아도는 쌀 좀 북한 땅에 보내 막힌 남북대화 물꼬도 트고, 굶주린 우리 북녘 동포에게 배 좀 채워주면 오죽 좋으련만! 근데 김정은이란 놈이 핵폭탄실험이나 하고 있으니 쌀 주는 것도 틀려버린 것 같아!"

벼 익어가는 들녘에서 아저씨와 나는 북한 핵실험까지 나눴습니다.

벼 익는 소리를 듣는 농부에게 풍년의 풍요로움이 기쁨으로 보상받는 가을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태그:#가을들녘, #황금들판, #풍년, #벗풀, #물옥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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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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