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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작품을 정리하는 문은희 화백
2000년 작품을 정리하는 문은희 화백 ⓒ 문은희

2000년 세상 사람들은 뉴 밀레니엄이라고 떠들썩했다. 문은희 화백에게도 2000년은 칠순으로 이제 노년기에 들어가는 때다. 회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전시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고전이라고 하면 지금까지 만든 모든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것으로, 삶과 예술을 종합하는 의미가 있다. 그러한 회고전을 2000년 3월에 공평아트센터에서 열기로 했다.

그 전에 문 화백은 자신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는 글을 <언론과 비평> 1990년 2월호에 쓴 바 있다. 제목은 '나의 인생 나의 예술'이다. 글의 핵심은 세 가지다. 나는 그려야 한다, 그려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경향의 화가로 불리고 싶지 않다. 나는 그림에 관한 한 자유롭기 때문이다. 49세 되던 해 누드의 길로 들어섰다. 여체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일본에서 세계 최초의 수묵 누드화가로 인정받았다.

"누군가 나의 예술을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 했지만, 나는 감히 '영혼과 육체의 만남'이라고 표현해 보고 싶다. '영혼' 그것으로도 '육체' 그것으로도 완전치 못하다. 그것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이 완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인생도 나의 예술도 아직은 '미완성'인 셈이다. 아, 나의 이 고통은 언제나 끝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신문>의 문은희 기사
<여성신문>의 문은희 기사 ⓒ 이상기

1990년대 중반까지 문화백의 예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은 1995년 9월 1일자 <여성신문>에 나온 바 있다. 전미희 기자의 글로 4회 연재되었는데, 그 내용이 아주 정확하게 정리되었다. 연재 타이틀은 '이야기여성사'였으며, 동양화가 문은희의 삶과 예술을 중간 정리하고 있다. 연재는 수묵 누드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체의 선을 묵으로 표현한 수묵 누드화가, 30년 한국화 경력에 세계 최초의 '수묵누드' 개척, 서양의 형태와 동양의 선묘의 새로운 조화, 흐느적거리는 붓이 칼날처럼 서는 경지 체험 등의 제목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수묵누드 미술관을 세우고 싶은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소망이 꿈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공평 아트센터  전시 포스터
공평 아트센터 전시 포스터 ⓒ 문은희

그럼 이제 2000년대 들어 문은희 화백의 삶과 예술은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문은희 화백은 2000년 칠순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예술을 정리하고 종합하는 회고전을 연다. 그것이 2000년 3월 공평 아트센터에서 열린 '소원 문은희 회고전'이다. 그리고 2001년 5월에는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역시 '소원 문은희 회고전'을 연다. 이때 34m와 40m짜리 누드 프리즈를 동시에 걸 수 있었다.

이 두 번의 전시 이후 문은희 화백 단독 개인전이 열린 것은 2016년이다. 그 동안 문화백은 누드 콜라주를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새로운 시도인 지공예를 한다. 누드 콜라주는 구상성을 강조하고, 사상과 메시지를 표현하는 쪽으로 나간다. 지공예는 수묵누드를 하는 과정에서 버리게 된 화선지를 이용, 입체조각 형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지공예에서도 문화백의 사상과 감정이 잘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문화백의 예술가 정신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공평 아트센터에서 열린 회고전

 공평 아트센터 회고전 팜플렛
공평 아트센터 회고전 팜플렛 ⓒ 이상기

공평 아트센터에서의 소원 문은희 회고전은 2000년 3월 22일부터 28일까지 1주일간 열렸다. 400평의 공간에 1959년 졸업 작품인 당인리부터 2000년 제작된 누드 콜라주까지 100점 이상의 작품이 걸렸다. 작품은 풍경, 추상, 자연정물, 수묵 누드, 누드 콜라주, 도자기로 대별된다. 이때는 272쪽에 달하는 문은희 도록 겸 자료집도 발행되었다.

자료집이 될 수 있는 것은 평론가와 기자들이 쓴 작가론과 작품론 그리고 전시평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도록의 앞부분에 천상병 시인의 '천상의 나부'와 이상범 시인의 '선·나상 –소원 문은희전에-'가 실려 있다. '천상의 나부'는 앞에 소개한 바 있어, 이곳에서는 이상범 시인의 시 '선·나상'의 한 연을 소개한다.

 이상범 시인이 쓴 시서화
이상범 시인이 쓴 시서화 ⓒ 이상기

"선(線)이 달리면서
선(線)이 꿈을 꾼다.
스칠 곳엔 스쳐 가고
머물 곳엔 머물러서
짜릿한 곡선(曲線)을 돌리며
목숨들이 눈을 뜬다."

도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문화백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모노그라피(Monography)가 실려 있다. 문은희 도록 겸 자료집은 포트폴리오적 성격 외에 학술서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작품 사진, 평론과 기사, 이력, 전시회 목록 등이 문은희의 예술을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이 자료집을 만드는 데는 자식과 사위가 애를 썼다. 비매품으로 1000부를 발행했다.

 공평 아트센터 전시회를 찾은 김성환 화백
공평 아트센터 전시회를 찾은 김성환 화백 ⓒ 문은희

공평 아트센터 회고전도 대성황이었다. 일주일 내내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누드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져, 수묵 누드와 누드 콜라주에 대한 논의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외국의 전시회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은 장르의 다양성과 관람객 수를 보고 한 말이었다. 고바우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은 <문화일보>에 난 기사를 가지고 와 보여주기도 했다. 누드 크로키를 함께 한 바탕골 미술관 박의순 관장도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문은희 회고전을 알리는 기사는 3월 16일 <조선일보>에서 "'수묵 누드' 문은희 회고전"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먼저 나왔다. 고희 기념 회고전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기사에서 문화백은 1980년대 중반 국내 최초로 수묵 누드화를 개척한 원로 한국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34m와 40m짜리 누드 군상화를 이번 전시의 백미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기사
한겨레신문 기사 ⓒ 이상기

그리고 전시가 끝나는 3월 22일 <한겨레> 미술 분야 '한겨레 창'에서 문은희 회고전이 자세히 다뤄졌다. 관심 분야는 역시 누드다. "그의 붓결 따라 꿈틀거린다. 발가벗은 몸이"라는 제목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쓴 구본준 기자는 문 화백의 수묵 누드가 빠르면서 거친 붓질로 인체의 박진감과 섬세함을 포착했다고 적고 있다. 누드 콜라주는 강렬한 움직임보다는 부드럽고 넉넉한 사유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도 역시 34m, 40m짜리 누드 군상화를 대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시가 끝난 2000년 4월 5일 한겨레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잡지 <한겨레 21>은 문은희 화백의 삶과 예술을 2쪽에 걸쳐 소개했다. 이 글에서는 새롭게 선보인 누드 콜라주를 색다르게 이야기했다. "미처 작품이 되지 못했던 옛 화선지 속의 숱한 나신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고. 이번 회고전에 나온 새로운 장르가 누드 콜라주라고.

청주 예술의 전당 회고전

 청주 예술의 전당 회고전 알림 플래카드
청주 예술의 전당 회고전 알림 플래카드 ⓒ 문은희

2001년 소원 문은희 회고전은 5월 2일부터 10일까지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다. KBS 청주방송국이 주최하고 청주시에서 후원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청주시는 1999년부터 청주 공예비엔날레를 개최해 예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2001년은 제2회 청주 공예비엔날레가 열리는 해여서 주 전시장인 예술의 전당에서 국내 대가의 미술 전시회를 여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문은희 화백이 충북에 살고 있어서 전시 명분도 충분히 있었다.

문화백은 이 회고전에 산수, 감, 누드 등 100여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청주 예술의 전당은 공간이 넓어 작품을 여유 있게 걸 수 있었다. 그리고 34m와 40m짜리 대형 누드 프리즈를 ㄱ자로 걸어 그림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청주 회고전은 서울의 공평 아트센터 회고전만큼 사람이 많이 오지는 않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두 도시의 인구 차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에 대한 관심 차이다.

 청주 회고전 팜플렛
청주 회고전 팜플렛 ⓒ 이상기

청주는 중규모 도시로 예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 측면에서 대도시인 서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 사람들은 화가의 예술성보다는 그들의 삶이나 에피소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다 누드라는 장르가 주를 이루는 전시여서 일반 사람들이 그림에 다가가기는 더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누드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수묵으로 선을 그려 우아하고 고상하게 인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문 화백의 누드는 야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예술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문 화백의 누드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청주 전시회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참석해 평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2001년 몇 개월 전인 1월 23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김기창 화백은 문은희의 평생 스승으로 항상 전시회를 찾아 비평하고 격려해 주었다.

 청주 예술의 전당 회고전
청주 예술의 전당 회고전 ⓒ 문은희

문 화백에게도 김기창 선생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큰 후원자가 한 사람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그림에 대해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어진 점 역시 큰 손실이었다. 대학 때 은사들 중에는 천경자 화백만 남았다. 그러나 천경자 화백도 1998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이제 고희를 넘긴 문은희 화백에게도 원로 화가라는 명칭이 붙곤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또 다른 예술 장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버려진 수묵 누드화를 입체적으로 살려내는 지공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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