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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다음은 전남 순천시에 소재한 장소이다. ○○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은?
○○로 333에 있는 ○○체육관, ○○초·중·고등학교, ○○대교, ○○탑, ○○비.

정답은 '팔마(八馬)'이다. 순천시는 현재 사설승마장이 있긴 하나 제주도와 달리 예로부터 말이 특산품이던 고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곳곳에는 여덟 마리 말이 앞발을 들고 보란 듯이 있다. 게다가 오는 10월에는 시민의 날과 연계하여 제38회 팔마문화제도 열린다. 이정도이면 순천시는 팔마의 고장이라 불러도 지나침이 없다. 순천시가 이처럼 팔마를 애지중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의 '최석'이라는 인물과 관련된다.

고려에 대한 역사는 조선시대 문종 때인 1451년에 발행된 139권의 <고려사>와 1452년에 35권으로 편집된 <고려사절요>가 있다. 이 <고려사> 권121, 열전 34에 훌륭한 관리라는 의미의 '양리(良吏)'로 최석(崔碩)의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를 <고려사절요> 권20 충렬왕 7년(1281)에도 일부 수정·기록했다. 

사진 속 팔마비는 이수광 때 건립한 '팔마비'이다. 팔마비는 청렴한 고려 승평부사 최석이 당시 고을의 헌마 폐단을 끊은 덕을 덕을 기리기 위해 고려 1281년 12월 이후에 '최석팔마비'가 최초 만들어졌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것을 이수광이 1617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팔마비'라 하여 다시 세웠다.
▲ 이수광 때 건립한 팔마비 사진 속 팔마비는 이수광 때 건립한 '팔마비'이다. 팔마비는 청렴한 고려 승평부사 최석이 당시 고을의 헌마 폐단을 끊은 덕을 덕을 기리기 위해 고려 1281년 12월 이후에 '최석팔마비'가 최초 만들어졌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것을 이수광이 1617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팔마비'라 하여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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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순천은 '승평(昇平)'이라 불렸는데, 벼슬아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지금의 시장격인 태수 부사(府使)에게는 말 8필, 부시장격인 부사(副使)는 7필, 국장급인 법조(法曹)는 6필을 마음대로 고르도록 해 선물하는 관례가 있었다.

승평의 부사(府使) 최석이 1281년 12월에 비서랑으로 임명돼 돌아가게 됐다. 이에 8필을 고르라 청하니 '개경까지만 타고 갈 수 있으면 되니 굳이 고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도착하자 말을 돌려보내려 하니 고을 사람이 받질 않았다.

그러자 최석은 "당시 고을에 있을 때 내 암말이 새끼를 낳아 데려왔는데 이것이 탐욕이었다. 이를 알고서 겉으로만 사양한다 여기는 것이 아닌가?"라며, 승평 주민에게 받은 말 8필에, 승평에 근무할 때 개인 소유의 암말이 낳은 망아지까지 더하여 총 9필을 돌려줬다. 이후에는 말을 바치는 폐단이 끊겼고,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해 팔마비를 세웠다.

공민왕 14년(1365)에 부사로 온 최원우는 비석이 쓰러져 있는 것을 다시 세우고, <팔마비>라는 시를 지었다.

"오가는 승평 땅 절서가 바뀌고/ 보내고 맞이함에 부끄러운 일 많음은 백성 것을 빼앗을 때라네/ 덕 없이 후대에 전해지리라 말하지 마소/ 최군의 팔마비를 다시 세우는데" (<순천옛시>, 순천문화원, 2000)

세월이 흘러 <지봉유설>로 유명한 이수광(1563~1628)이 <동국여지승람>을 읽다가 최석의 팔마비에 대해 알고 사모하게 된다. 광해군 8년(1616년)에 순천 부사로 와서 그의 흔적을 찾으나 이미 정유재란(1597)으로 소실돼 없었다. 참고로 현재 순천시의 명칭인 순천(順天)은 고려 충선왕 2년인 1310년부터 사용됐다.

이에 이수광은 고을의 원로인 허건과 생원 정지추 등 시민과 협력해 고려시대 당시 받침인 대석에 비를 1617년 재건하고, <중건팔마비음기(重建八馬碑陰記)>를 지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승평지>(1618)와 <신증승평지>(1729)에 남아있다. 당시 전면 글씨 '팔마비'는 원진해가 쓰고, 후면 비문은 이수광이 짓고 김현성이 썼다.

1617년이수광에 의해 새로 건립된 팔마비는 원래 연자교 인근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시가지 정비를 이유로 현재의 중앙로 95로 옮겨졌다. 좌측 아래에 있는 것이 이수광이 지은 '중건팔마비음기'이며 우측이 팔마비 설명문이다.
▲ 팔마비 전경 1617년이수광에 의해 새로 건립된 팔마비는 원래 연자교 인근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시가지 정비를 이유로 현재의 중앙로 95로 옮겨졌다. 좌측 아래에 있는 것이 이수광이 지은 '중건팔마비음기'이며 우측이 팔마비 설명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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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평지> '고적'의 팔마비 기록에 따르면, 본래 "燕子橋南路傍"이라 하여 연자교 남쪽 도로변에 '최석팔마비'가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수광이 다시 건립하면서 현산의 '타루비'와 요양의 '화표주'처럼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다들 그것이 양공과 정령위를 위한 것임을 안다는 의미로 '팔마비'라고만 새겼다. 즉, '팔마비=최석'이라는 불변의 공식이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에 시가지 정비계획에 따라 당시 승주군청 앞 도로변인, 현재의 중앙로 95로 옮겨졌다. 1977년 8월에 비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건립했고, 현재 전남 유형문화재 제76호로 등록돼 있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160cm, 너비 77.5cm다. 재질은 해석(海石)이며, 대석은 가로 140cm, 세로 85cm, 높이 40cm다. 비석의 전면에는 양각으로 '팔마비'라 되어 있으나, 중건기를 음각한 뒷면은 마모가 심해 해독할 수 없으나 비문은 <승평지>를 통해 전해진다.

이수광은 <증건팔마비음기>를 통해서 최석이 다스린 지 400년이 지났어도 백성이 그 덕을 생각함이 "마치 어제 일인 듯"하다며 비석에 담긴 의미를 되새겼다.

"앞으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만약 청렴한 선비라면 한결같이 기쁘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는 일에 더욱 힘쓸 것이고, 설혹 탐욕스러운 자라 하더라도 두려워하여 삼가는 마음이 움직여 불선(不善)한 마음을 고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이 비석을 세우는 것이 벼슬아치들의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풍속과 기강에 관계됨이 또한 매우 중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 팔마비가 한 때 떠나가는 사람을 그리워할 뿐 후세에 보고 느끼게 할 만한 것이 없는 유애비(遺愛碑)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렸다.

한편, 죽헌 허수(1673~1726)도 '팔마비'란 제목으로 시를 남겼다.

"최석 원님 성예가 강관에 진동하네/ 갈 때는 다섯 말이 여덟 말로 돌아 왔네/ 한 비석이 높직하게 큰길가에 섰고/ 천년의 땀방울이 석호의 이마에 맺혔네"

하지만 허수의 시는 말의 숫자에서 오류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8마리가 9마리로 돌아왔다. 벽소 이영민(1881~ ?)은 '순천가(順天歌)'에서 "연자루에 올라 사방 풍경을 바라보니/ 반구정 언덕에 복숭아꽃 피었고 팔마비 앞엔 맑은 물 흘러라"라고 팔마비 주위 풍경을 묘사했다. 아마도 시인에게 이 '맑은 물'은 최석의 청렴함으로 이룬 순천의 아름다운 정신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난 8월 30일 오후 2시 순천시청 대회의실에서는 순천시의회 '순천역사바로잡기 특별위원회'(이하 특별위원회)가 주관한 '팔마비 및 팔마정신 재조명 토론회'가 열렸다. 최정원 특별위원장 진행으로 신민호 시의회 운영위원장, 최인선 순천대 교수, 장채열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소장, 김정민 복성고 1학년 학생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시의장과 관계자, 시민 등 100여 명 이상이 모여 팔마정신의 뜻을 기렸으나, 정작 시장과 시청 문화예술과 소속 공무원은 불참했다.

팔마비에 대한 역사적 오류가 있는데, 현재 설치된 팔마비에 대한 설명문도 예외는 아니다. 이수광 때 중건한 팔마비에 대한 의미, 말의 출처 그리고 건립시기에 대한 오류가 나타난다.
▲ 팔마비 설명문 팔마비에 대한 역사적 오류가 있는데, 현재 설치된 팔마비에 대한 설명문도 예외는 아니다. 이수광 때 중건한 팔마비에 대한 의미, 말의 출처 그리고 건립시기에 대한 오류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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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론 결과를 종합하면, 곳곳에 팔마비에 대한 역사적 오류가 있는데 심지어 팔마비의 설명문에서도 나타난다. 바로잡아야 할 역사는 총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팔마비에 대한 의미다. 현재 중앙로 95에 설치된 팔마비는 이수광의 '팔마비'임에도, 설명문에 "이 비는 최초의 선정비이자 정덕비로서 고려 충열왕 대에 이곳 승평부사를 지냈던 최석의 덕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며 '최석팔마비'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수광이 지은 중건기를 보면 "벼슬아치들의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풍속과 기강에 관계됨이 또한 매우 중대"하다고 건립 의의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참고로 설명문은 왕명 표기도 '충열왕'과 '충렬왕'이라고 두 개로 표시했다. 

이에 최 교수는 "이수광은 팔마비의 중건과 함께, 거기에 지방민의 깨끗하고 순박한 정신을 함께 담아 아름다운 지방정신으로 이어가길 당부"한 것이며, "순천 팔마비의 역사 속에는 지방관의 공직윤리와 함께 맑고 깨끗한 고을정신이 조화를 이룬, 이중주적 역사성이 배어있다"라고 평했다.

임종기 순천시의장을 비롯한 특별위원회는 팔마비가 '송덕(頌德)'을 넘어서, 최석 부사의 청렴한 행동으로 인해 관리에게 말을 바치던 당시 순천의 고질적인 병폐를 없앤 만큼 '적폐청산'의 정신을 포함한다고 해석한다. 참고로 최원우의 시만 보더라도 헌마 풍습이 백성의 것을 '빼앗는' 탐관오리의 행위로 묘사됐다.

김정민 학생은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에 있어서 우리 순천은 최석의 정신, 즉 청백리의 정신을 이어받아 적폐청산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김계선의 후원으로 1977년 팔마탑을, 소실된 연자루를 1978년에 복원하여 죽도봉 공원에 건립했다. 앞발을 들고 선 말의 모습은 흡사 헌마 폐단이라는 적폐를 끊은 청백리 최석의 강인한 의지를 널리 알리는 듯 보인다.
▲ 팔마탑과 연자루 재일동포 김계선의 후원으로 1977년 팔마탑을, 소실된 연자루를 1978년에 복원하여 죽도봉 공원에 건립했다. 앞발을 들고 선 말의 모습은 흡사 헌마 폐단이라는 적폐를 끊은 청백리 최석의 강인한 의지를 널리 알리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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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말의 숫자와 망아지의 출처에 대한 오류이다. 설명문에는 "그동안 낳은 새끼 말까지 더하여 아홉 마리를 되돌려 보냄으로써"라는 표현을 사용해 자칫 최석 개인 소유의 암말이 아닌, 헌마한 말이 낳은 망아지로 오해할 수도 있다. 팔마탑의 경우도 "上京한 뒤 그동안에 낳은 새 말 한 마리를 더하여 아홉 마리를 되돌려"라고 돼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의 "吾守汝州, 吾有牝馬生駒"에서 보듯이 당시 최석이 승평 재직 당시에 그가 소유한 말이 낳은 망아지이다. 그는 받은 8필의 말에다 자신의 망아지까지 보태어 돌려주는 결연함으로 헌마 관행을 근절시켰다. 

셋째, 비의 건립시기가 잘못 알려져 있다. 설명문에는 "이에 그 청렴한 뜻을 기리고자 고을 주민이 충렬왕 34년(1308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라 기록했고, 재일동포 김계선의 후원으로 1977년 건립된 죽도봉 팔마탑에는 "忠烈王때(1277年)"라며 달리 적혀있다. 이에 최 교수는 "1308년에 대한 문헌 근거는 없으며, 1281년 12월에 최석이 비서랑으로 임명이 된 것이므로,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이라고 정리했다.

1977년에 재일동포 김계선의 후원으로 건립된 팔마탑에 기재된 비문에는 팔마비가 1277년에 세워졌다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실제로는 최석이 비서랑이 된 1281년 12월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추가된  말 1필의 출처에 대해서도 승평 재직 당시 최석이 소유한 말이 낳은 것이 아닌, 헌마 8필 중 말이 낳은 망아지로 오해할 수 있게끔 되어있어 교정이 시급하다.
▲ 팔마탑에 기재된 팔마 유래 1977년에 재일동포 김계선의 후원으로 건립된 팔마탑에 기재된 비문에는 팔마비가 1277년에 세워졌다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 실제로는 최석이 비서랑이 된 1281년 12월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추가된 말 1필의 출처에 대해서도 승평 재직 당시 최석이 소유한 말이 낳은 것이 아닌, 헌마 8필 중 말이 낳은 망아지로 오해할 수 있게끔 되어있어 교정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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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특별위원회는 팔마비를 현재의 지방문화재가 아닌, 국가지정의 보물로 승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승평지> '고적' 순서에도 엄연히 팔마비, 임청대, 이정선정비, 청덕비, 이통제비 순서로 가장 우선 순위에 있는데, 이통제비의 경우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음을 고려했다.

여수시 고소동에 있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좌수영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71호이다. 본디 이 좌수영대첩비의 옆에 있는 타루비도 1973년 5월 7일에 보물 제571호로 일괄 지정되었으나, 여수시민들이 분리하여 지정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이에 1998년 11월 27일에 타루비는 별도로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됐다. 바야흐로 팔마의 고장 순천시민이 팔마비를 위해 나설 때다.


태그:#팔마비, #승평부사 최석, #헌마 폐단, #적폐청산, #올바른 역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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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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