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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 <세계테마기행> 방송 화면
 EBS <세계테마기행> 방송 화면
ⓒ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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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너마저…"

당혹감과 배신감을 토로하기 전에, 우선 내가 오래전부터 EBS의 '열혈 팬'임을 밝혀야겠다. 우리 집의 TV 채널은 '4번' 하나뿐이다. 종편은 말할 것도 없고, KBS와 MBC 등 지상파 방송을 '금연하듯' 끊은 지는 이미 오래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유일하게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면, 오로지 '채널 4번' EBS를 통해서다. 우리 가족에겐 EBS가 세상과 소통하는 눈이다.

특히 EBS의 간판 프로그램이라는 <다큐프라임>과 <세계테마기행>은 나와 우리 가족의 인생관을 변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다. <다큐프라임>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혔고, <세계테마기행>을 보며 오늘도 난 세계 일주를 꿈꾼다. 두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적금 통장을 털어 매년 방학 때마다 가족과 해외여행에 나서게 된 것도 EBS를 만난 뒤다.

아이들도 EBS를 통해 꿈을 키웠다. 내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중3 아들 녀석은 오지탐험가가 되는 게 꿈이고, 그 꿈이 지금껏 변한 적 없다. EBS의 자연 다큐멘터리와 여행 프로그램을 무슨 인터넷 강의처럼 집중해서 보는 것도 그래서다. 몇 년 전인가는 <세계테마기행>의 일반인 참가자를 공모한다는 소식에, 시험기간 중인데도 몇 날 며칠 마음 설레하며 신청서를 써서 제출한 적도 있다. 물론, 탈락하긴 했지만.

그랬던 EBS에 더 이상 고마워할 필요가 없게 됐다. 우리 가족에게 꿈을 키워준 이들은 EBS가 아니라, EBS의 온갖 '갑질'에도 꿋꿋이 버텨내며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외주 제작사의 PD들이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오프닝 때마다 보이는 EBS의 로고와 배경음악이 아닌, 프로그램이 끝난 뒤 흐르는 자막 맨 뒤 깨알같이 적혀있는 제작사의 이름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독립PD의 '제 살 깎아내기'로 버티는 구조였다니

 EBS 외주 다큐 PD가 남아공 현지 촬영 중 사망했다. 사진은 박환성 PD.
 EBS 외주 다큐 PD가 남아공 현지 촬영 중 사망했다. 사진은 박환성 PD.
ⓒ EBS 다큐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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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아프리카로 자연 다큐멘터리 촬영을 갔다 불의의 사고로 고 박환성, 김광일 두 PD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그 순간 지난해 고 박환성 PD가 제작한 <다큐프라임>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상을 수업자료로 활용했던 기억이 떠올라 너무나 황망했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EBS의 외주 제작사 PD들에 대한 관행적인 착취 구조가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어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고 박환성 PD가 최근 준비 중이었던 <다큐프라임> 2부작 '야수의 방주'의 계약 체결 과정만 놓고 보면, EBS의 행태가 언뜻 '조폭'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EBS는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외주 제작사 PD들에게 정부기관을 상대로 제작비 지원 신청하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거칠게 말해서, EBS가 자체적으로 제작비를 확충해주기는커녕 PD들에게 '앵벌이'를 시킨 셈이다.

EBS의 '갑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겨레21 보도에 따르면, 촬영을 준비하는 와중에 어렵사리 서류를 꾸며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는데, '외주 제작사 협력 상생 방안'이라는 내부 규정을 근거로 외주 제작사가 받은 지원금의 40%를 선납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외주 제작사가 정부기관의 지원금을 받으면, EBS와 외주 제작사가 각각 40%씩 나눠 갖고, 나머지 20%는 EBS가 제작사에 인센티브로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1억 원짜리 사업을 따내도 정작 제작에 투입되는 액수는 4천만 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4천만 원은 EBS라는 브랜드 사용료이고 나머지 2천만 원도 줄지 말지를 EBS가 결정하는 것이니, 외주 제작사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EBS의 이름을 내걸고 송출하는 숱한 프로그램들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계약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제작비의 부족은 PD에게 '1인 다역'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두 명의 PD가 사망한 사건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직접 야간운전을 하다 일어난 교통사고라고 하니, 사실상 제작비를 떼먹은 EBS가 '가해자'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듣자니까, 수년 전 지상파 방송에서 내부 제작한 동물 자연 다큐멘터리의 경우 편당 제작비가 7억 원 정도였는데, 이번 고 박환성 PD에게 EBS 측이 제시한 제작비는 고작 편당 7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무려 10배나 차이가 나는 액수다. 그는 대체 무슨 복안으로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받아들였을까. '웃픈' 비유지만, 과거 군대 시절 고참이 달랑 천 원짜리 한 장 손에 쥐여주며, '만두와 라면, 아이스크림에다 담배 한 갑 사오라'고 심부름시키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내 돈 얹어가며 '상납'을 해야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내무반 줄빠따'가 이어졌다. 그에게 EBS란 제 살 도려내어 '상납'해야 하는 고참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

명색이 '교육방송'인데... 아이들이 '방송의 현실' 알까 봐 두렵다

요즘 아이들에게 방송 PD는 의사와 변호사, 교사 못지않은 선망 직종이다. 당장 우리 반에도 다큐멘터리 PD를 꿈꾸는 아이가 여럿 있다. 그중 한 아이는 자신이 롤 모델로 삼고 있는 현직 PD와 작품을 일일이 거론할 정도로 심취해 있다. 그들은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을 마다하고 일찌감치 영상 학원에 등록하고, 관련 수업을 듣기 위해 한 달간의 서울 생활도 기꺼이 감내한다.

그래선지 학년 초 동아리 회원 모집 때 가장 경쟁률이 치열한 곳이 바로 방송반이다. 올해도 10대 1을 넘어섰다고 한다. 학교 방송실이라 해 봐야 낡은 카메라 몇 대에 보잘 것없는 방송 장비가 전부지만, 학교생활 중에 그저 카메라를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설레한다. 특히 방송제가 대세가 된 학교 축제 기간에는 그들의 진로를 탐색하고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가 된다.

자습시간에 여느 친구들처럼 문제를 푸는 대신 콘티를 짜고, 틈틈이 카메라를 들고 교정을 돌아다니며 촬영 연습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낯설지만 대견하다. 학교가 교육과정 속에서 그들의 재능을 키워줄 수는 없다 해도, 그들의 바람을 응원할지언정 전가의 보도처럼 대학입시라는 틀에 가두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그리는 장밋빛 꿈이 너무나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비보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때, 실력 있는 PD가 되겠다고 오늘도 열심히 땀 흘리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던 이유다. 얼마 전 tvN 이한빛 PD의 자살 소식에 그러잖아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아이들이다. 당시 그들은 얼마나 업무량이 많고 노동 강도가 셌으면, 명문대 출신의 젊은 PD마저 그런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싶어 PD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다.

시청률에 울고 웃는 종편도 아니고, 명색이 '교육방송' 일진대 EBS는 그들의 꿈을 북돋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카메라에 세상을 담겠다는 꿈에 부푼 아이들이 갑을관계라는 냉혹한 현실에 고개 숙이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면, 우리에게 방송의 미래는 없다. 당장 아이들이 전도유망했던 두 PD를 죽음으로 내몬 EBS의 '갑질'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될까 봐 두려운 이유다.

이번 일로 지금껏 쌓아온 EBS의 명성이 두 PD를 비롯한 숱한 '을'들의 헌신과 희생에 빚지고 있음이 명명백백히 밝혀졌다. EBS는 기존의 불공정한 계약 관행을 혁파하고 그들에게 정당한 '몫'을 돌려주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고의 재발을 막고 작품의 질을 높이는 유일한 대안이 될 것이다. 삼가 고 박환성, 김광일 PD의 명복을 빈다.

 사단법인 한국독립PD협회는,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이들의 귀환을 돕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독립PD협회는, 고 박환성·김광일 PD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이들의 귀환을 돕고 있다.
ⓒ 한국독립PD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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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박환성PD#김광일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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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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