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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나호를 운항하는 정채호(오른쪽) 선장과 가와사끼 선장은 20년 지기이다. 가와사끼 선장은 고베항 국제범선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여수를 떠나는 출발점에서부터 행사를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오는 전과정을 동행하며 코리아나호의 키를 잡았다. 돌아오는 중간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고향인 사세보로 가면 되는데도 여수까지 왔다가 비행기로 되돌아가 두 분의 우정을 가늠할 수 있게했다
 코리아나호를 운항하는 정채호(오른쪽) 선장과 가와사끼 선장은 20년 지기이다. 가와사끼 선장은 고베항 국제범선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여수를 떠나는 출발점에서부터 행사를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오는 전과정을 동행하며 코리아나호의 키를 잡았다. 돌아오는 중간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고향인 사세보로 가면 되는데도 여수까지 왔다가 비행기로 되돌아가 두 분의 우정을 가늠할 수 있게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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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개항 150주년을 맞이해 열린 국제범선축제에 초대받은 국내 유일 범선 코리아나호에는 귀한 손님이 한 분 탔다. 일본 사세보에서 온 가와사끼 선장이 그다. 늘 미소를 잃지 않는 그는 햇볕에 그을려 검게 탄 건강한 모습이다.

여수 소호항에서 고베항으로 출발하는 선상에서 코리아나호 정채호 선장이 "일본에서 오신 선장인데 우리와 전 일정을 함께할 것"이라며 소개한 그는 영어를 약간 할 뿐 한국말은 거의 못한다.

여수에서 고베까지는 800㎞나 된다. 그는 고베항 행사를 마치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여수로 귀국할 때 시모노세키에서 내리면 고향이 훨씬 가까운데도 악명 높은 현해탄을 건너 여수까지 왔다가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코리아나호는 주로 동력으로 항해한다. 뱃머리에 있는 돛(제노아)을 올리면 2노트 정도 빨라지지만 그래보았자 9노트 정도이다. 때문에 3일 걸려 고베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현해탄의 높은 파도에 혼이 난 일행들이 "쉬지 말고 곧장 가자"고 해서 약 50여시간만에 고베에 도착했다.

귀국할 때도 쉬지 않고 곧장 돌아왔기 때문에 배를 운전할 줄 아는 선장과 기관원이 힘들면 언제나 키를 잡고 배를 운전해줘 정말 든든했다. 특히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의 내해를 통과할 때는 인근을 지나는 배나 해운관계자들로부터 수시로 운항 관련한 무선연락이 들어와 가와사끼 선장이 대답해줬다.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여수까지 오는 그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고베항 국제범선축제에 참가한 코리아나호 모습.
 고베항 국제범선축제에 참가한 코리아나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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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님! 현해탄을 건널 때 흔들리는 배 때문에 힘들 텐데 굳이 고생하면서 여수까지 갔다가 다시 비행기로 일본까지 갑니까?"
"바다를 좋아해서 친구와 함께 우정을 나누는 항해를 하고 싶어서죠."

여수에서 현해탄을 건너 고베로 갈 때는 배가 심하게 흔들려 기울어진 갑판까지 바닷물이 올라와 내 신발이 젖기도 했다. 대부분은 멀미를 심하게 하고 토하기까지 했지만 내속은 약간 불편하기만 했다. 배 멀미로 심한 고생을 해본 사람들은 멀미가 얼마나 힘든지 안다. 나는 뱃사람 체질일까? 속이 약간 거북하기만 했다. 다행인 것은 동행한 지담스님이 엄지부분에 침을 놓아주니 뱃속이 가라앉았다.

40년 이상을 바다에서 지냈다는 가와사끼 선장은 심한 파도에도 끄떡하지 않고 자동항법장치(AIS)와 레이다를 주시하며 정채호 선장과 교대해 배를 운전해줬다. 정채호 선장에게 가와사끼 선장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는지를 묻자 답변이 돌아왔다.

고베항 범선축제에 참가한 러시아 팔라다호 스탭들이 코리아나호를 방문해 기념촬영했다. 사진 속에는  가와사끼 선장의 모습도 보인다
 고베항 범선축제에 참가한 러시아 팔라다호 스탭들이 코리아나호를 방문해 기념촬영했다. 사진 속에는 가와사끼 선장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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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끼 선장을 처음 만난 건 제1회 나가사끼 국제범선축제가 열린 2000년입니다. 그러니까 18년 됐죠. 당시 가와사끼 선장은 범선인 가이세이호(해성호)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현재는 배를 운항하지 않고 휴가 중입니다. 휴가 중에는 여수까지 와서 코리아나호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관광을 하거나 지인들과 교류합니다."

그는 119톤짜리 범선을 타고 세계일주도 했다. 6개월 걸린 항해에는 45명이 동행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까지 항해할 때에는 순수하게 돛으로만 달렸다"는 그는 "밤에는 돛을 많이 펴지 않고 낮에는 많이 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정채호(70) 선장에게 "몇 살까지 바다생활을 할 것 같은가?"를 묻자 "88살까지"라고 말하자 가와사끼 선장은 "나는 그 나이에 죽을 것 같다"며 웃었다.

코리아나호 정채호 선장... 일본에 한국의 혼을 보여줬다는 자부심 느껴

국내 유일 범선인 코리아나호는 1983년에 네덜란드에서 건조됐다. 길이 41m, 무게 135톤에 정원이 71명인 코리아나호는 수밀격벽이 3중으로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배 밑창에 280톤에 달하는 납이 있어 복원력이 뛰어나다.

그동안 코리아컵 국제범선대회, 이사부 항로 탐사, 각종 국제요트대회 , 나가사키 국제범선축제대회에 참가했다. 정채호 선장이 2000년에 열렸던 제1회 나가사키 국제범선축제대회에 참가했을 적에 있었던 재미있었던 일화를 이야기해줬다.

"태극기를 달고 나가사키항에 코리아나호가 입항하자 교민들이 찾아와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일본인들한테 무시당하면서 살았는데 코리아나호가 이곳까지 찾아와 자부심을 느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교포들이 가끔씩 연락을 하고 여수까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는 "일본사람들이 나보다 김치를 좋아해 일본행사에 참가할 때마다 냉장고 5개에 김치를 가득 싣고 가 선물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치 얘기를 하던 그가 젊었을 적 서울소재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일화를 소개했다.  
고베항 개항 150주년 기념 국제범선축제에 참가한 코리아나호를 방문해 고베일보 기자(맨 왼쪽)가 선원들과 인터뷰 하고 있다
 고베항 개항 150주년 기념 국제범선축제에 참가한 코리아나호를 방문해 고베일보 기자(맨 왼쪽)가 선원들과 인터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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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장 명령이 떨어지면 일본사람들이 마늘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일주일 전부터 김치를 안 먹었어요. 7년 전 가고지마까지 갔다 여수로 돌아오던 중 제주도 근해에서 태풍급 바람을 만나 3일 정도를 버티며 항해를 했지만 파도와 바람에 밀려 일본의 '고도'로 회항해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2박 3일간 여관에 머물렀는데 예쁘장한 여주인이 융숭하게 대접을 해줘서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한국김치를 얻고 싶어서였어요. 냉장고에 있던 김치를 많이 줬거든요."

코리아나호가 고베를 오갈 때 IT사업을 하는 박상구(58)씨가 승선했다. 기관사(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앞으로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할 계획이라는 그가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코리아나호는 매스컴에서 많이 들었어요. 죽기 전에 이런 멋진 배를 한번 타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궁인창씨 페이스북에 승선안내 소식이 있어 신청했습니다. 12일 동안 배를 타보니 기대 이상으로 좋습니다. 총각시절부터 타고 싶었던 꿈이 이뤄진 셈입니다. 은퇴한 후에는 바다와 관련된 곳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코리아나호에 승선할 예정입니다."

바다는 육지모습과 다르다. 험한 파도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무한한 평화가 다가오기도 하고 인생을 반추해보기도 한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은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해줬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코리아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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