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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시작, 고려궁지와 강화산성

강화가 지금의 강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시대 때 왕이 몽골군을 피해 이곳으로 천도한 이후부터입니다. 비록 화친한 뒤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의 궁궐과 상곽을 파괴했지만, 이때부터 강화도는 전란이 일어나면 왕이 피신할 수 있는 전략적 요새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죠. 이 고려궁지는 바로 그런 강화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다시 세워진 강화산성도 바로 이와 같은 강화의 위상과 관계 있습니다. 실제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한 뒤 항전을 하려고 했었는데요, 청군이 워낙 빨리 진격을 한 탓에 강화도로 못 오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죠.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지어 실록을 보관한 것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 강화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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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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