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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년 20, 30대 청년 6명은 시력을 잃었습니다. 파견노동자로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만졌던 메탄올이 실명을 불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노동건강연대'와 <오마이뉴스>는 실명 청년들에게 닥친 비극과 현재의 삶을 기록하고, 누가 이들의 눈을 멀게 했는지 파헤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시력을 잃은 청년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노동자의 몸에 새겨지는 역사를 기억한다.
 노동자의 몸에 새겨지는 역사를 기억한다.
ⓒ 김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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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풍경 중에 어떤 것들은 지금은 볼 수 없기에 사진으로만 남아서 낯선 외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거나 그 성격이 거의 달라지지 않기도 합니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뿌연 하늘을 이고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봅니다. 건설현장, 택배, 버스와 화물차 운전, 배달 오토바이...미세먼지가 사회문제가 된 것은 과거와 다른 풍경인데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먼지가 많거나 적거나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기후조건 가려가면서 일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5월 1일 재벌기업의 조선소에서 무너지는 크레인에 깔려 사망하신 노동자들에게 휴일의 선택권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일거리가 밀려 야간작업을 할 때면 정말이지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난다. 연거푸 이틀 밤, 사흘 밤을 꼬박 새워가며 일할 때에는 정신이 아득하여 저도 모르게 눈이 저절로 감긴다. 졸지 말고 밤일 잘하라고 주인아저씨가 사다 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워 일한 다음 날에는 팔다리가 제대로 펴지지 않고 눈만 멀뚱멀뚱한 산송장이 되는 일도 있다.'

조영래 변호사가 1970년의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이야기를 기록한 <전태일 평전>에는 평화시장의 열세 살, 열네 살 여공들의 이야기가 빼곡합니다. 1960~70년대 봉제 공장의 풍경입니다.

전태일이 노동자의 권리를 찾자고, 노동자모임을 만들자고 할 때 선배들에게 들은 말은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느냐'였다고 합니다. 선배들은 전태일에게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은 모임의 이름을 '바보회'라고 지었습니다. 

이제는 거의 사라진 강제노동, 인권유린의 작업환경과 지금도 여전한 노동운동의 어려움이 <전태일 평전> 안에 동시에 펼쳐집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공장으로도 관심을 돌려 중졸이나 고졸자로 위장 취업해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장 밖의 대학생들 가운데는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직업병에 주목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서 펼쳐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운동으로 노동자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고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국가는 '근로자'만을 원했지만, 노동자들은 기업과 국가의 통제에 저항하고자 했습니다.    

1979년 정부는 '무재해운동'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유행한 'ZERO 재해운동'을 따라 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밀어붙인 산업화, 공업화의 한가운데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사고와 직업병으로 다치고 생명을 잃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재해운동'은 산업재해를 없애자고 하면서 노동자들의 정신을 탓하는 노동자 훈육, 노동자 길들이기 역할을 했습니다.

'무재해' 깃발을 걸고 조회를 하거나 체조를 하고, 사고가 나면 사고를 덮고 무재해 몇만 시간 달성을 계산했습니다. 노동자 안전과 건강 보호에 대한 기준을 담은 '산업안전보건법' 제정보다 노동자 정신 교육하는 군사 문화적인 '무재해운동'이 먼저 시작됐습니다.

정부와 기업은 노동자가 무지하고, 딴생각을 해서 사고가 일어난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왔고, 언론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해 왔습니다. 위험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을 감수하며 일하는 노동자들, 이 속에서 이윤을 뽑는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임금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고가 일어나면 전문가들과 언론은 '안전불감증'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진단하곤 합니다. 해결책은 노동자에 대한 안전교육을 강화하는 것으로 날 때가 많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직하청 노동의 문제가 사고를 일으킨다고 이야기하고 있긴 합니다. 그런데 해결책은 비정규직, 하청에게 위험한 일이 몰리는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구를 잘 주고 안전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일본에서 들여온 중고 기계가 뿜어낸 독가스

1988년 섬유기업 '원진레이온'에서 집단 이황화탄소 중독이 일어나 6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직업병 진단을 받은 대형 직업병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노동부가 원진레이온 공장에 무재해 2만 5000시간 표창장을 준 이후였습니다. 원진레이온은 1964년 일본에서 중고기계를 들여와서 설립한 회사였습니다. 낡은 기계가 뿜어내는 유해물질에 눈감은 독재 정권이 원진레이온 집단 직업병 사건의 공범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가려 있던 산업재해와 직업병 문제를 드러내면서 한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8년에 일어난 또 하나의 비극적 사건이 있었는데,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온도계 공장에 취업한 소년이 2개월 일한 후 쓰러져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이 소년은 1973년생, 사망 당시 만 14세, 우리 나이 열다섯 살. 이름은 문송면이었습니다.

두 사건 이후, 많은 이들이 정부와 경찰의 탄압을 받으며 거리에서 집회를 하고, 직업병인정을 요구하고, 제도개혁을 요구하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습니다.  

1995년에는 LG 전자부품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 20여 명이 생리중단, 재생불량성빈혈 등의 진단을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산과정에서 사용하던 세척제가 원인으로 밝혀졌고, 이 사건은 솔벤트집단 중독 사건이라고 이름 붙여졌습니다.

2007년에는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23살 노동자 황유미의 급성 백혈병 발병과 사망이 있었고, 딸의 직업병 인정을 위한 아버지의 헌신적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현재까지 7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있다고 제보되고 있는 삼성전자의 직업병 문제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제는 사라진 산업이기에 과거이면서, 여전히 직업병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기에 현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광산노동자들이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강원도 태백과 정선의 광산에서 석탄을 캐서 에너지를 생산하던 광부의 노동과 삶은 이제 석탄박물관의 전시실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폐증을 안고 늙어가는 광산노동자들은 2017년 3월에도 '광산노동자 산재보험 제도개선 토론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산업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며, 노동자의 몸에 새겨진 직업병의 역사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교육은 해결책이 아니다

2016년 6명의 청년 파견노동자가 메탄올로 시력을 잃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정부가 나섰다
 2016년 6명의 청년 파견노동자가 메탄올로 시력을 잃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정부가 나섰다
ⓒ 민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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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으로 와 보겠습니다.

콜센터에서 고객 불만 처리를 담당하다가 세상을 떠난 현장실습생에게 사람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교육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해결책이 교육이라면, 권리교육을 받았는데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말하게 됩니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취업자 숫자만 세고 있는 학교와 교육 당국의 반교육적 제도운영, 마른 수건 짜내듯이 미성년의 학생을 압박하고 몰아세운 기업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진짜 해결책은 미뤄둡니다.

일하다가 눈이 머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삼성전자·LG전자의 3차 하청업체인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야간작업자가 더 많았기에 밤의 12시간, 메탄올 증기에 온몸이 젖은 노동자들은 시력을 잃었습니다. 6명의 노동자 모두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갔고, 안과에 찾아갔지만, 원인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의료진, 공장, 노동부 모두 우왕좌왕하거나 사실을 숨겼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정부가 낸 연구용역 보고서를 봤습니다. 영세공장 사장들이 안전관리자를 두어야 한다, 노동자교육을 잘해야 한다 등의 제안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스마트폰을 제조하는 원청기업에 따르면, 메탄올을 대체하는 물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 정말, 이게 뭡니까.

3차 하청업체에서 벌어진 일이라지만 원청 대기업이 얼마든지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정부가 내놓은 안전관리자니 교육이니 하는 대책은 별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인터넷만 되면 어디서든 알바 사이트에 들어가서 공장 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저 6명처럼요. 파견업체들 이름이 드림하우스, GS솔루션 등입니다. 좋은 단어들 갖다 붙여서 회사를 차리고, 다달이 인건비와 4대 보험료 일부를 떼어갔죠. 공장은 공장대로 이런 업체를 통해서 사람을 구합니다. 일은 공장에서 하는데 책임은 안 집니다. 정부는 알고 있습니다. 인력을 보내는 회사, 공장을 돌리는 업체 사이에서 노동자에게 불리한 일이 벌어질 때 책임지는 곳이 분명치 않다는 것을. 파견업체와 공장 사이에 거대한 빈틈이 있는데 방치해 왔습니다.  

메탄올 실명 노동자들의 불행은 봉제 공장 시다들의 이야기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 시대의 노동, 그 시대의 모순이 노동자들의 몸에 새겨져 버렸습니다.

노동은 존중받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책임은 기업과 정부가 지는 정의로운 시대로 점프~ 하길. 역사에 점프는 없다면, 우리의 현대사에서 노동자가 온 몸으로 증언해 온 직업병과 산업재해의 역사를 쓰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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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전수경 기자는 노동건강연대 활동가입니다.



태그:#누가 청년의 눈을 멀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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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하청, 일용직, 여성, 청소년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건강하고 평등한 노동을 꿈꿉니다.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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