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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성 여포와인농장 대표
 여인성 여포와인농장 대표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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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 [최정욱 소믈리에와 함께 하는 대한민국 와인기행] 여포와인농장 ①

여인성 대표는 어떤 계기로 와인을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나라의 다른 농가형 와이너리와 마찬가지로 출발은 포도농사였다. 그는 김민제 대표와 결혼하면서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어 아내를 설득했다.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어머니가 농사짓는 것을 거들면서 살고 싶었어요. 또 시골에서 살면 도시에서 전세로 사는 것보다는 풍족하면서 여유로울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거죠."

영동이 어디인가. 우리나라 최고의 포도산지가 아닌가. 게다가 어머니가 포도 재배를 하고 있었다. 그가 포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해인가, 포도 값이 아주 좋았다. 집에서 재배하는 포도 양이 적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욕심이 생겼다.

그는 다음 해, 포도밭에 있는 포도를 수매했다. 익으면 따기로 하고 수확 전에 미리 포도를 사들인 것이다. 포도를 좋은 값을 받고 팔면 목돈을 쥘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해, 포도가 채 익기 전에 서리가 내렸다. 그나마 다행은 다른 과수원보다 그가 사둔 포도가 잘 익었다는 것.

그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어서 서둘러 수확해 저온저장고에 보관했다. 포도 작황이 좋지 않으니 기다리면 포도 값이 오를 것으로 기대했지만, 끝내 포도 값은 오르지 않았다. 결국 서둘러 헐값에 내다팔 수밖에 없었다.

여포와인농장
 여포와인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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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포도를 수매하는 것보다 직접 포도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고 판단, 이번에는 땅을 빌려 본격적으로 포도 재배를 시작했다. 자연농법을 연구해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했지만, 그해 작황에 따라 포도 값은 등락을 되풀이했다.

"무농약으로 인증까지 받아 포도를 생산해도 실제로 돈이 되지 않았어요. 고생은 직사하게 하고.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좋은 포도를 만들어도 그것을 인정해주는 소비자들이 없으니, 참으로 어렵더라고요."

결국 그는 포도 가공 산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팔리지 않은 포도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고, 포도를 생과로 파는 것보다는 가공해서 파는 게 부가가치가 훨씬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다른 포도재배농가처럼 포도즙을 만들어서 팔았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그가 와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98년이나 99년일 겁니다. 와인만들기 모임이 막 태동될 때였어요. 와인만들기를 통해서 정제민 대표를 만난 거죠."

그는 정제민 예산사과와인 부사장을 만나 본격적으로 와인에 관심을 갖고, 와인을 만들게 된다. 와인제조도 배웠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한 와인 만들기였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제대로 해보고 싶어지더란다. 조건은 갖춰져 있었다. 직접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되니까.

와인생산설비
 와인생산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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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부터 주류제조면허를 취득 준비를 시작해 2007년에 시설조건부로 허가를 받았다. 와인 만들기 시작한 지 10년만이었다. 2009년에 와인을 생산, 2010년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처음 와인을 만들 때는 자기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하죠. 저도 그 단계를 거쳤어요. 마셔보면 내 와인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디다 내놓을 때는 솔직히 좀 불안했어요. 미숙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럴 때 내게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있어요. 자신감을 갖게 해준 거죠. 이태리 벨레트리 대학의 시모네타 모레티 교수입니다."

벨레트리 대학은 포도재배와 양조를 가르치는 전문대학으로 로마에서 가까운 벨레트리에 있으며, 영동군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면서 양조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2009년 여름, 이 대학에서 와인제조를 가르치는 모레티 교수가 여포농장을 방문했다.

모레티 교수는 그가 만든 와인을 시음한 뒤 "영동에 와서 한국와인을 만났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로소 여 대표는 자신이 만든 와인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포도밭에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카베르네 쇼비뇽, 샤르도네, 알렉산드리아 등등. 와인에 눈을 뜨면서 생식용 포도와 와인제조용 포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여 평이나 되는 땅에 50여 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한국 포도라면 캠벨이나 MBA, 거봉 등을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포도품종은 100여 가지나 된단다. 농촌진흥청이나 농업기술원, 와인연구소 등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나무 품종들을 시험 재배하면서 새로운 포도 품종을 개발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청수 품종이다. 이렇게 개발한 포도 품종으로 새 와인을 개발하거나, 새 와인을 개발하는 와이너리를 지원하기도 한다.

모레티 교수와 여인성 대표
 모레티 교수와 여인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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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대표가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시험 재배한 것은 우리나라 토질과 기후에 맞는 포도 품종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포도가 양조용으로 적합한지 여부도.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그가 2009년에 처음 생산한 와인은 1톤가량 된다. 병으로 환산하면 1200병 정도.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팔거나 마셔서 소비했다. 그렇다면 남은 와인은 어떻게 됐을까? 와인을 보관하는 저온저장고가 없으면 와인 맛은 변할 수밖에 없다. 와인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관도 중요하다. 

그가 만든 와인은 맛있고 만족스러웠지만, 여름이 지나면서 맛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여포와인농장에 저온저장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포농장에 10여 톤이 넘는 식초가 보관돼 있는 까닭이다.

"와인은 잘못 보관하면 다 맛이 가요. 식초가 되는 거죠. 약간 맛이 가도 팔 수 있는데,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시장에 내놓은 와인은 최고의 품질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식초가 된 와인은 포도농사를 지을 때 밭에 뿌려 영양제로 사용해요. 친환경 농법인 거죠."

애써 포도농사를 지어 맛있는 와인을 만들었는데 식초가 됐을 때 상실감은 아주 크다. 와인제조설비를 제대로 다 갖추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농가형 와이너리에 그만한 시설을 갖출 자본이 있을 리 없었다.

처음 와인을 만들었을 때 레이블에 김민제 대표와 여인성 대표의 사진을 넣었다.
 처음 와인을 만들었을 때 레이블에 김민제 대표와 여인성 대표의 사진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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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와인을 개발하면서 매년 생산설비를 늘리고 제조공장을 확장하다보니 돈을 벌기는커녕 빚이 점점 늘어나더란다. 와인을 팔아서 새 와인을 만드는 순환구조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전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나. 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엄청난 수업료를 쏟아 부은 셈이지만, 지금의 여포농장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여인성 대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와인 만드는 게 좋았어요. 포도농사를 짓는 것도 좋았고, 새 품종을 가져다가 시범 재배를 하는 것도 좋았죠. 제가 돈 계산은 잘 못해요. 몇 병을 팔아서 얼마나 수익이 나는지, 이런 계산을 잘 못해요. 와인 축제에 가면 와인을 파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와인을 설명하고 같이 마시고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하거든요."

남편이 와인에 미쳐 있으면 경제적인 손익 계산은 아내 몫이 된다. 김민제 대표가 그랬다. 김 대표는 복장이 터지다 못해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갈등도 많이 겪었단다. 결국 김 대표는 가정 경제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일자리를 구했다.

궁금했다. 여인성 대표는 철도공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데 경제적으로 어렵다니?

"와인을 만들면서 시련을 많이 겪었어요. 시행착오도 많았고. 우리가 돈이 많아서 와이너리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비빌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생적으로 커야 하는데, 금전적인 여유가 없다보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건물을 짓고, 생산설비를 들여놓고, 포도재배를 하고... 그러다보니 이 사람 월급 갖고는 택도 없었어요."

김민제 대표
 김민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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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제 대표의 설명이다. 김 대표는 4~5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결국 일을 그만두고 <여포와인농장>으로 돌아왔다. 여인성 대표 혼자 와인을 만들고 파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와인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남편을 자신이 나서서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줘야지 <여포와인농장>이 자리를 잡을 것 같더란다.

김 대표는 작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여포와인농장 와인 홍보와 판매에 뛰어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김 대표는 영동군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을 보다 많이 홍보하고 판매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푸드 트럭에 영동와인을 싣고 다니면서 홍보, 시음, 판매를 할 예정인데, 쉽지 않네요. 이동형 트럭에서 와인을 판매할 수 없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와인을 팔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방법을 찾고 있어요."

☞이어지는 기사 : 여포와인농장 ③


태그:#와인기행, #광명동굴, #여포농장, #여인성, #김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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